<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썸네일형 리스트형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2부, 책을 어떻게 읽고 쓸 것인가) -정약용 지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2부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 멀리 내다 볼주 알아야 한다 又示二子家誡 책을 어떻게 읽고 쓸 것인가 유향(劉向)* 에게는 아들 흠(欽)이 있었고, 두업(杜嶪)*도 임(林)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양보(楊寶)*도 진(震)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며, 환영(桓榮)*도 전(典)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처럼 훌륭한 아들이 아버지의 책을 읽을 수 있던 경우는 많았다. 너희들에게 바라노니, 다행히 나의 저서에 대하여 깊이 연구한 후 심오한 뜻을 알아주기만 한다면 내가 아무리 궁색하게 지내더라도 걱정이 없겠다. 지식인이 책을 펴내 세상에 전하려고 하는 것은 단 한 사람만이라도 그 책의 진가를 알아주기를 바라서이다. 나머지 욕하는 사람들이야 관계할 바 없다. 만약 내 책을 정.. 더보기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2부, 문명세계를 떠나지 말라) -정약용 지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2부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 문명세계를 떠나지 말라 중국은 문명한 것이 풍속이 되어 아무리 궁벽한 시골이나 먼 변두리 마을에 살더라도 성인이나 현인이 되는 데 방해받을 일이 없으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해서 서울 문밖에서 몇십리만 떨어져도 태곳적처럼 원시사회인데 하물며 멀고 먼 시골이랴? 무릇 사대부 집안의 법도로는 벼슬길에 높이 올라 권세를 날릴 때 빨리 산비탈에 셋집을 내어 살면서 처사(處士)로서의 본색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 벼슬길이 끊어지면 빨리 서울 가까이 살면서 문화(文華)의 안목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금 내가 죄인이 되어 너희들에게 아직은 시골에 숨어서 살게 하고 있다만, 앞으로의 계획인즉 오직 서울로부터 10리 안에서만.. 더보기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2부, 친척끼리 화목하게 지내려면) -정약용 지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2부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 넘어져도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又示二子家誡 친척끼리 화목하게 지내려면 효(孝)와 제(弟)는 인(仁)을 행하는 근본이 된다. 그러나 부모를 사랑하고 그 형제끼리 우애하는 사람쯤이야 세상에 많이 있어 그렇게 치켜세울 만한 행실이 될 수 없다. 큰아버지나 작은아버지가 형제의 아들을 자기 아들처럼 여기고, 형제의 아들들이 큰아버지나 작은아버지를 자기 아버지처럼 여기고, 사촌형제끼리 서로 사랑하기를 친형제처럼 해서 집에 온 손님이 열흘 넘도록 묵으면서도 끝내 누가 누구의 아버지이고 누가 누구의 아들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해야만 겨우 집안의 기상을 떨칠 수 있다. 사람의 집에서 부귀가 한창 피어날 때는 골육간에 의지하고 서로 믿게 .. 더보기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2부, 시는 어떻게 써야 하나) -정약용 지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2부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 시는 어떻게 써야 하나 又示二子家誡 번웅(樊翁:채제공 蔡濟恭)은 시에 있어서 시인의 기상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유성의(劉誠意)*의 시를 읽을 때마다 기상의 약한 듯 처량하고 괴로운 내용이 있었고, 소릉(少陵)*의 시에는 번화하고 부귀한 시어가 많았지만 끝내 뇌양(耒陽)*에서 곤궁하게 살다가 죽었으니, 꼭 그렇게 시와 기상이 관계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요즘 내가 상자 속에 넣어둔 옛날 시고(詩篙)들을 점검해보니 난리를 만나기 전, 즉 한창 벼슬을 하여 문학하는 선비들이 들고 나던 한림원(翰林院)을 훨훨 날며 지내던 때 지은 시편들은 대개가 처량하고 괴로우며 우울한 내용이었고, 장기에 유배 갔던 때.. 더보기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2부, 책을 지을 때 유의 사항) -정약용 지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2부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 책을 지을 때 유의사항 명나라 청나라 이래로 경서에 관한 학문의 갈래가 많아서 각자 여러 종류의 책을 냈다만 세상에 유익함을 끼치는 책은 거의 없다. 그러나 [주역]과 [예기(禮記)]에 관한 두책은 나의 견해로써 상당히 많은 미개척 분야가 알려지게 되었다. 하늘이 총명함을 아껴서 한 사람에게만 아름다움이 다 돌아가도록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겠다. 상례(喪禮)는 이미 정리가 되었지만 왕조례(王朝禮)는 논하여 저술한 적이 없다. 하물며 길례(吉禮) 가례(嘉禮) 군례(軍禮) 빈례(賓禮) 등에는 연구분야가 아직 넓게 남아 있으니, 이런 게 이른바 "남아 다하지 않은 복이 있어 자손에게 남겨준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왕조례와 상.. 더보기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2부, 국방에 관한 책) -정약용 지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2부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 국방에 관한 책 모원의(茅元儀)가 지은 [무비지(武備志] 는 국방과 병법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사건의 본말(本末)을 종합하여 완전히 자세하게 밝히진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에는 아직 이러한 책이 없기에 그 편목(偏目)을 본받아 우리나라의 국방에 관한 책을 따로 편찬하고 싶다. 하지만 평소 뜻만 마음속에 서려 있을 뿐 유배생활이래로 참고할 책을 구할 수 없어 끝내 손대지 못하고 말았구나. 너희들은 나의 뜻을 알고 있으니 아무튼 편찬할 계획을 세우고 내용의 토대를 작성해두어라. 다행히 내가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게 되면 감정(鑑定)해서 뺄 것은 빼고 손볼 것은 손볼수 있도록 하여라. 지리(地理) 등에 관한 여러 조목은 이미 .. 더보기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2부, 나의 시에 대하여) -정약용 지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2부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 나의 시에 대하여 나는 천성적으로 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신유년(1801)이전에는 대게 필요에 의해 어찌할 수 없이 화답(和答)하는 시를 지어야 했고, 더러 저절로 흥취가 일어나거나 한가롭게 읊조린 것도 있으나 결코 신경써서 지은 시는 아니었다. 유배생활을 하고부터 지은 시들은 괴로움을 토로한 것이 없잖은데, 나는 평소에 유자후(柳子厚)*가 유배지에서 지은 시나 문장이 거의 모두 처참하고 서러운 언어로 한탄하고 있음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던 터라 괴로움이나 토로하는 시는 결국 그만두었다. 세월이 오래 지나고 나서는 고생스런 처지도 편안하게 여겨져 산에 오르고 물가에 이르렀을 때 품은 정서가 더러는 활달하게 피어나 호탕한 .. 더보기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2부, 나의 저서를 후세에 전하거라) -정약용 지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2부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 저술에 관한 뜻 示二子家誡 나의 저서를 후세에 전하거라 내 일찍이 조괄(趙括)이라는 사람은 불초자(不肖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조괄은 자기 아버지의 저서를 읽어서 후세에 전했으니 훌륭하지 않으냐? 내가 나라의 은혜를 입어 실낱같은 목숨만은 보전하여 여러 해 동안 곤궁하게 살아오면서 저술한 책이 많아졌다. 다만 한탄스러운 것은 너희들이 내 곁에 있지 않아 미묘한 말과 의미를 전해들을 기회가 적고 문리(文理)가 틔지 못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습성이 생기지 않은 것이다. 몇가지를 억지로 이야기해주어도 듣자마자 잊어먹어 마치 진(秦)나라 효공(孝公)에게 임금 되는 도(道)를 들려주는 것과 같으니 *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내 아들들이 이 .. 더보기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2부, 임금의 잘못을 드러내라 ) -정약용 지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2부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 임금의 잘못은 드러내라 미관말직에 있을 때도 신중하고 부지런하게 온정성을 다해서 맡은 일을 다해야 한다. 언관(言官)의 지위에 있을 때는 아무쪼록 날마다 적절하고 바른 의론(議論)을 올려서 위로는 임금의 잘못을 공격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고통이 알려지게 하며 더러는 잘못된 짓을 하는 관리들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 모름지기 지극히 공정한 마음으로 언관의 직책을 행사하여 탐욕스럽고 비루하고 음탕하며 사치하는 일에는 당연히 손을 써야 조치하고 자기에게 유리하게만 의리를 인용해서는 안되고 자기 편만 편들고 다른 편을 공격해서 엉뚱하게 남을 구렁텅이 속에 밀어넣어서는 안된다. 벼슬에서 해직되면 그날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며, 아무리 절.. 더보기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2부, 벼슬살이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정약용 지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2부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 벼슬살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임금께서는 벼슬하기 전부터 나를 알아주셨고 벼슬에 나온 뒤로는 나를 더욱 깊이 이해해주셨다. 임금 곁에서 중요한 정책을 수립할 때도 임금의 뜻과 내 뜻이 부합되었던 적이 많았는데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많았다. 그럼에도 마침내는 내 계획안과 정책이 역사책에 오르거나 공적이 많은 사람의 사적(史蹟)을 새겨놓은 종묘의 솥에도 새겨지지 않았음은 무엇 때문이겠느냐? 옛 성철들이 말하기를 "그 지위(地位)에 있지 않고서는 정사(政事)를 도모하지 않는다" 하였고, [주역(周易)]에는 "군자는 생각하는 범위가 그 지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회고해보면 그때는 나이가 어리고 식견이 얕아 이런 .. 더보기 이전 1 ··· 6 7 8 9 10 11 12 ··· 1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