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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목민심서[11부] 진황(賑荒)6조 구황(救荒)의 정사에는 예비만한 것이 없으니, 예비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구차할 따름이다. ​ ​ [문헌고비(文獻備考)에 이런 내용이 있다. "영조 12년에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었다. '작년 농사가 꽤 잘되었는데 금년 역시 풍년이 들 듯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우연히 송나라 신하 사마광(司馬光)의 문집을 보았더니, 흉년이 든 후에 진휼곡을 수집하려면 어려우니 반드시 풍년의 각 고을로 하여금 진휼곡을 미리 수집하도록 하되 그 많고 적음을 보아 진휼할 때처럼 등급을 나누어 상벌을 내리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좋습니다. 지금 풍작이 든 때를 이용하여 각 도와 각 읍으로 하여금 진휼곡을 모으.. 더보기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목민심서[11부] 진황(賑荒)6조- 1. 구휼물자 준비[備資]비자 황정(黃政)은 선왕(先王)이 마음을 쏟았던 바이니, 목민하는 재능은 이것에서 볼 수 있다. 황정이 잘되야 목민관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끝나는 것이다. ​ [문헌비고(文獻備考)]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선조 26년 (1593) 서울에 큰 기근이 들었는데 임금이 의주 피난길에서 돌아와 교시를 내렸다. "음식 담당자가 하루에 백미를 여섯 되 올리는데, 나는 본래 하루 세끼를 다 먹지는 않으니 세 되의 쌀인들 어찌 다 먹겠는가. 이제부터 세 되를 덜어 서울에 설치된 다섯 곳의 진장(賑場)에 나누어 보내도록 하라." 영조 9년(1733)에 이런 교서가 내려졌다. "오늘 거듭된 기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나의 부덕한 소치가 아.. 더보기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목민심서[10부]공전(工典)6조 ​ 6. 공작[匠作] ​ 전거(田車)를 만들어 농사를 권장하고 병선(兵船)을 만들어 전쟁에 대비하는 것은 수령의 직무이다. ​ 전거는 간단해 만들기가 매우 쉬운데, 다만 백성들이 아직 이를 본 일이 없다. 전거로 풀과 똥과 곡식을 나르면, 전거 한 대에 싣는 양이 소 네 마리에 싣는 양과 비슷하니, 어찌 힘을 더는 것이 아니겠는가? 수레를 만들기 어려운 것은 바퀴살과 바퀴통 때문이다. 횡판(橫板)하나와 나뭇가지 둘을 세워 스물입자[廾]모양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축을 꿰고 둘레를 보완하여 바퀴를 만들면, 돈은 반전(半錢)도 쓰지 않고서 수레 한 대를 만들 수 있다. 여기에 끌채를 대고 자체를 붙여 전거를 만들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더보기
​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목민심서[10부] 공전(工典) 6조 ​ 6. 공작[匠作] ​ 농기구를 만들어 백성들의 농사를 권장하고, 직물 짜는 기계를 만들어 부녀자의 길쌈을 권장하는 것은 수령의 직무이다. ​ 이기양(李基讓)이 봉명사신으로 청나라에 들어갔다가 면화씨를 발겨내는 교거(攪車)를 구입하여 조정에 바쳤는데, 정조가 오영문(五營門)에 명령하여 각기 본떠 만들어서 전국에 보내도록 하였다. 만들기는 했으나 아직 보내지는 않았는데 임금이 승하하여 그 일이 중지되었다. 내가 그 교거를 보니 축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나무고 하나는 쇠이다. 쇠에는 가느다란 홈이 있고, 축 머리에는 나사가 없다. 굴리는 데에는 열십자 모양의 바람개비[風輪]가 있어 사람이 의자 위에 앉아 손으로는 축의 자루를 돌리고 발로는 가로쐬기[横楔]를 밟으면 .. 더보기
​​::목민심서[10부]공전(工典)6조-6. 공작[匠作] ​​::목민심서[10부] 공전(工典) 6조 6. 공작[匠作] 번거롭게 물품을 제거하고 재간 있는 기술이나 솜씨를 다 모으는 것은 탐욕이 두드러진 것이다. 비록 온갖 장인이 다 있어도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 것이 청렴한 선비의 관부(官府)이다. ​ ​ 이수일(李守一)이 통제사(統制使)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의 전임자들은 날마다 관아의 장인들을 부려 기괴하고 사특한 물건을 만들어 권세가들을 섬겼는데, 그 비용이 달마다 1천 냥을 헤아렸다. 이수일이 이를 모두 폐지하고, 명목만 있고 실제로는 없는 군향미(軍餉米)는 모두 조정에 보고하여 탕감하고 면제하니 모든 마을이 편하게 여겼다. 그는 일찍이 서울에서 이런저런 빚을 지고 내려온 관리들이 뇌물 바치는 습속을 증오하여 끝내 돈 1전(錢), 명주 한 자도 중요한.. 더보기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목민심서[10부]공전(工典)6조 ​ 5. 도로(道路) ​​여점(旅店)에서 간사한 자를 숨기지 않고 원(院)에서 음탕한 짓이 자행되지 않으면 백성은 마음을 맑게 할 수 있다. [다산필담]에서 말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민간에서 살아서 백성들의 실정과 거짓을 조금은 알고 있다. 무릇 도둑이 숨은 곳은 모두 여점이다. 진실로 정결한 마을에서는 발붙이기 어렵다. 낯선 얼굴이 한번 나타나면 서로 말하며 손가락질하기 때문에 아침에 숨어도 저녁이면 드러나 발붙이지 못한다. 오직 여점만은 사방의 사람들이 아무도 오래 머물지 않기 때문에 몸을 숨기기에 편리하다. 여점마다 간사한 자를 숨겨두어 천리가 고리로 이어져 있는 게 도둑떼의관행이다. 한 군데서 도둑이 잡히면 도둑과 소.. 더보기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목민심서[10부]공전(工典)6조 ​ 5. 도로(道路) ​ 교량은 사람을 건너게 하는 시설이니, 날씨가 추워지면 마땅히 즉시 설치해야 한다. ​ ​ 자산(子産)이 정나라의 정치를 담당했을 때, 자기의 수레로 사람들을 진수(溱水)와 유수(洧水)를 건너게 하였는데, 맹자는 "은혜로우나 정치를 알지못하도다. 11월에 걸어 다니는 다리가 이루어지고 12월에 수레가 다닐 수 있는 다리가 이루어지면 백성들이 건너기를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김서구(金敍九)가 해남현감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고을에는 큰 냇물이 있어 해마다 백성들에게 수해의 걱정이 있었다. 그가 백성을 위하여 돌을 쌓아 제방을 만들고 돌다리를 만들었는데 다리 밑부분은 무지개 모양으로 하였다. .. 더보기
​​::목민심서[10부]공전(工典)6조-5. 도로(道路) ​​::목민심서[10부]공전(工典)6조-5. 도로(道路) ​ 5. 도로(道路)​ ​도로를 잘 닦아 여행자가 그 도로로 다니기를 원하는 것도 훌륭한 수령의 정사이다. ​ 유산필담(酉山筆談)에서 말하였다. "옛날의 역사를 훑어보니 귀융이 검각을 개통한 것과 진요좌가 태항산을 개통한 것은 모두 천혜의 험지를 뚫고 깨뜨려 평평한 평지를 이룬 것이다. 우리나라 왕성 5부 안의 애오개[牙聱峴]는 서강(西江)으로 가는 길이고, 약점현(藥店峴)은 용산(龍山)으로 가는 길로 수레가 서로 부딪치고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치는 분주한 곳이지만 돌 하나 뽑아내지 않아 울퉁불퉁 들쭉날쭉하여 발붙일 땅이 없고, 물구덩이를 하나도 치지 않아 가뭄에도 항상 질척질척하다. 이 고개를 한번 넘으면 진흙이 튀어 도포와 적삼이 다 더러워진다... 더보기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목민심서[10부]공전(工典)6조 ​ ​ 4. 성의 수축과 보수[修城] ​ 평상시에 성곽을 수축하여 여행자의 관광이 되게 하는 경우는 마땅히 종래의 것을 따르고 석재로 보수해야 한다. ​ 수원성을 쌓을 때 처음에는 다른 산의 돌을 구해오려다가, 정조 임금의 생각이 뛰어나서 앵봉(罌峯)을 깎아보니 온 산이 돌이었다. 이 돌로 성을 쌓으니 넉넉했다. 이것이 좋은 예가 된다. 혹 부득이 먼 곳에서 구해올 경우에는 마땅히 기중소가(起重小架)를 만들어 돌을 편리하게 들어올리게 해야 하고, 유형소거(遊衡小車)를 만들어 돌을 편리하게 실어나르게 해야 한다. ​ ​ ​ ​#목민심서 #정약용 #목민심서필사 #정선목민심서 #책소개 #책추천 #독서 #책읽기 #주부독서연구소 더보기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목민심서[10부]공전(工典)6조 ​ 4. 성의 수축과 보수[修城] ​ 병란이 일어나고 적이 쳐들어오는 급박한 때를 당하여 성을 쌓을 경우에는 마땅히 지세를 헤아리고 민정에 순응해야 한다. ​ 김성일(金誠一)이 경상우도(慶尙右道) 감사로 진주에 있으면서 촉석성(矗石成)을 수축하고 포대를 많이 설치하였으므로 적이 성을 깨뜨리지 못하였다. 성은 본래 사면이 모두 험준하였으나 임진년(1592)에 동쪽으로 이동하여 평지로 내려갔다. 그러자 적이 성 안을 살필 수 있는 높은 누각(樓閣)을 8개 만들고 큰 대나무 다발을 둘러쳐 화살과 돌을 막고서 그 안에서 성 안을 내려다보며 조총을 비오듯 쏘니, 성 안 사람들은 머리도 내밀지 못하다가 8일 만에 성이 함락됐다. ​ ​ ​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