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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목민심서[10부]공전(工典)6조-6. 공작[匠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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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10부] 공전(工典) 6조

6. 공작[匠作]

 


 

번거롭게 물품을 제거하고 재간 있는 기술이나 솜씨를 다 모으는 것은 탐욕이 두드러진 것이다. 비록 온갖 장인이 다 있어도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 것이 청렴한 선비의 관부(官府)이다.

이수일(李守一)이 통제사(統制使)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의 전임자들은 날마다 관아의 장인들을 부려 기괴하고 사특한 물건을 만들어 권세가들을 섬겼는데, 그 비용이 달마다 1천 냥을 헤아렸다.

 

이수일이 이를 모두 폐지하고, 명목만 있고 실제로는 없는 군향미(軍餉米)는 모두 조정에 보고하여 탕감하고 면제하니 모든 마을이 편하게 여겼다.

 

그는 일찍이 서울에서 이런저런 빚을 지고 내려온 관리들이 뇌물 바치는 습속을 증오하여 끝내 돈 1전(錢), 명주 한 자도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선사하지 않았다.

 

야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충무공 이순신은 통제사가 되어 날마다 관아의 장인으로 하여금 인두와 가위, 장도 따위를 만들게 하여 권세가들에게 선물하였다. 그 뜻이 아첨하여 섬기는 데 있지 않았다."

 

그런데 후세의 통제사들은 그를 관례 삼아 지금까지도 그렇게 한다. 이순신은 경우는 그 본의를 캐어 보면 한 차원 높은 것이니 일반론에 따를 수 없다.

 

김효성(金孝誠)은 고을살이가 청백하였다. 그 부인 이 씨(李氏)는 늘 고을살이에서 물러나 돌아올 때에는 비복(婢僕)들을 주의시켜 관부에서 가져다가 쓴 기물들을 모두 돌려주게 하였다.

 

집에 돌아왔을 때 아전이 부엌에서 쓰고 남은 것을 바치자 물리쳐 받지 않으면서 "이는 그분의 뜻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남편을 여윈 뒤 아들의 봉양을 좇아 고을살이 갈 때에도 항상 낡은 농 두 짝을 가지고 다녔는데, 아들이 농을 바꾸기를 청하자,

 

"나는 너의 돌아가신 아버님을 따라 여러 고을을 30년이나 두루 다녔지만 가지고 다닌 것은 이것뿐이었다. 지금은 사람도 농짝도 함께 늙었으니 어찌 차마 버리겠는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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