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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3부, 귀족 자제들이 쇠잔해지는 것 역시 천운) -정약용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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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3​부

 

둘째형님께 보낸 편지

 

둘째형님께서는 깊이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上仲氏


 

귀족 자제들이 쇠잔해지는 것 역시 천운

 

읍내에 있을 때 아전 집안의 아이들 네다섯명이 제게 배우러 왔었는데* 거의 모두가 몇년 만에 폐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아이 하나가 단정한 용모에 마음도 깨끗하고 필재(筆才)도 상급에 속하며 글 역시 중급 정도의 재질을 가졌기에 끓어앉혀서 이학(理學)을 공부하게 하였습니다.

 

만약 머리를 숙이고 힘써 배울 수만 있다면 이청(李晴)*과 더불어 서로 짝이 맞을 것 같았는데, 어찌된 셈인지 혈기가 매우 약하고 비위가 아주 변벽하여 거친 밥이나 맛이 변한 장(醬)은 절대로 목으로 넘기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저를 따라 다산으로 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폐학한 지가 4년이 되는데 서로 만날 때마다 탄식하며 애석해합니다.

 

귀족 자제들은 모두 쇠약한 기운을 띤 열등생입니다. 그래서 정신은 책만 덮으면 금방 잊어먹고 지취(志趣)는 하류에 안주해 버립니다.

 

[시경] [서경][주역(周易)] [예기(禮記)] 등의 경전 가운데서 미묘한 말과 논리를 가끔씩 말해주어 그들의 향학을 권해줄라치면, 그 형상은 마치 발을 묶어놓은 꿩과 같습니다.

 

쪼아먹으라고 권해도 쪼지 않고 머리를 눌러 억지로 주둥이와 낟알이 서로 닿게 해주는데도 끝내 쪼지 못하니, 아아,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곳 몇몇 고을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온도(道)가 모두 그러합니다. 근래 서울의 귀족 자제들은 사낭하는 일로 육경(六經)공부를 대신하는데도 진사 급제자 200명 가운데 언제나 50명을 넘게 차지하는 것도 역시 이런 형편 때문이니, 세상에 다시 문학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저 인재가 갈수록 고갈되어 혹 조그마한 재주로 이름이라도 기록할 줄 아는 사람은 모두 하천(下賤)출신들입니다.

 

사대부들은 지금 최악의 운명을 당했으니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곳에 내왕하는 소년이 몇 있고 배움을 청하는 어린이가 몇 있는데, 모두 양미간에 잡된 털이 무성하고 몸 전체를 뒤덮은 것이 온통 쇠잔한 기운뿐이니, 아무리 골육의 정이 중하다 한들 어떻게 깊이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천운(天運)이 이미 그러하니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또 이덕조(李德操)*가 이른바 '먹을 수 있는 물건'(독이 없음을 말함-지은이)이라 한 것과 같으니, 장차 이들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남자는 모름지기 사나운 새나 짐승처럼 전투적인 기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것을 부드럽게 교정하여 법도에 맞게 다듬어가야만 유용한 인재가 되는 것입니다. 선량한 사람은 그 한몸만을 선하게 하기에 족할뿐입니다.

 

또 그중에 한두가지 일컬을 만한 것이 있는 자라도 학문의 어려운 길로는 들어가려 하지 않고 곧바로 지름길만을 경유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주역]에 대해서는 고작[사전(四篆)]*만을 알고 [서경]에 대해서도 [매평(梅平)]*만을 아는데, 여타의 것도 다 그런 식입니다.

 

대체로 노력하지 않고 얻은 것은 비록 천지를 경동(驚動)시킬 만한, 만고에 처음 나온 학설이라 할지라도 모두 평범하게 간주하여 저절로 이루어진 것으로 치부해버리므로 깊이 있게 몸에 와닿는 것이 없습니다.

 

이는 비유컨대 귀한 집 자제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고량진미에 배가 불러 꿩이나 곰발바닥으로 요리한 맛있는 음식도 보통으로 여기게 되어, 마치 목마른 말이 냇가로 기운차게 달려가듯 걸인이나 배고픈 사람이 허겁지겁 달려들어 먹으려는 기상이 없는 것입니다.

 

이에 다른 학파의 주장을 만나면 너무 수월히 자신의 주장을 버리고 스승이 전수해주는 것도 모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심한 경우에는 진부한 말이라도 헐뜯기까지 하니 어찌 답답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살면서 두가지 학문을 겸해서 공부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하나는 속학(俗學)이요, 하나는 아학(雅學)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곳 아이들은 아(雅)만 알고 속(俗)은 알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아를 속으로 여겨버리는 폐단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허물이라기보다는 시세(時勢)가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해야겠지요.

*읍내에~왔었는데: [다신계안(茶信契案)]이라는 다산의 제자록(弟子錄)에 읍중제생안(邑中諸生案)이라 하여 손병조(孫秉藻), 황상(黃裳), 황취(黃聚), 황지초(黃芝楚), 이청(李晴), 김재정(金載靖) 등 6인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청:자는 학래(鶴來). 다산의 유배시절 제자로 [대동수경(大同水經)]을 정리했다.

*이덕조: 영조30~정조 10 (1754~86). '덕조'는 이벽(李蘗)의 자. 호는 광암(曠菴)으로 천주교 연구자. 다산 큰형의 처남으로 그의아버지 이보만(李溥萬)이 아들의 천주교 신봉에 반대하여 목을 매어 죽자 배교(背敎)하고 병사했다.

*사전: 다산이 지은 [주역사전(周易四篆)]

*매평: 다산이 지은 [매씨서평(梅氏書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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