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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2부, 채제공의 효행과 국량) -정약용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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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2부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

 

체제공의 효행과 국량


 

변옹은 지위가 참판에 이르렀으나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천한 일도 몸소 하였다. 도승지로 왔을 때 조정에서 돌아오면 곧바로 조복(朝服)을 벗고 땔감을 안고 가서 지사공(知事工)*의 방에 손수 불을 땠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구들장의 차고 더움이 알맞지 않을까 염려해서였다.

어머니에게 딸이 있었는데 요절하자 남기고 간 어린애들을 길렀으니, 아들은 참판 이유경(李儒慶)*이고 딸은 우진사(禹進士)의 아내였다.

 

어머니가 임종할 적에 번암(樊巖)을 불러 앞으로 오게한 다음 그애들을 당부하면서 "내가 이 두애들을 너에게 부탁한다. 내가 살아 있을 때처럼 이 아이들을 보살펴다오" 하시자, 공(公)은 그리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때부터 사내아이는 아들처럼 계집아이는 딸처럼 여겼다. 계축년(1793) 여름에 수상이었던 공이 밤에 임금을 뵈었을 때 상(上)이 "경(卿)의 집에 우씨(禹氏)의 아내가 이쏘? 자잘스런 비방이 있으니 경은 잘 살피도록 하시오" 말씀하시자 공은 그간의 사정을 아뢰고 집으로 물러나와서도 전처럼 행하였다. 이는 탁월한 행실이었다.

번옹은 전에 나의 과거 합격을 축하해주기 위해 우리 집에 온 적이 있었다. 마침 자리가 손방(巽方)에 앉아 건방(乾方)을 향하게 되었는데, 잠시 후에 손님들이 몰려와서 좌우로 응답하다가 반나절이나 지나 파하였으나 앉은 방향이 한치도 틀리지 않았다.

 

을묘년(1795) 봄에 상휘호도감(上徽號都監)으로 휘호(徽號)를 봉진(封進)하던 날, 육경(六卿)의 재신들이 모두 회합했다.

 

그때 내가 보니, 공은 두 무릎을 땅에 붙이고 우뚝 앉아 움직이지 않는 것이 마치 무쇠로 주조한 산악 같았고, 다른 군공(君公)들은 몸을 좌우로 기울이거나 의지하면서 뼛소리를 우두둑우두둑 내고 있었다.

공의 신장(身長)은 보통사람을 넘지 않았으며 허리둘레도 가늘었고 면모도 우람스럽지 못했다.

 

판서(判書) 권엄(權儼)*은 신장이 9척이나 되고 허리와 얼굴 모두 보통사람보다 컸다. 그러나 공을 곁에서 모시고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왜소하고 연약하여 마치 태산(泰山) 앞에 있는 작은 언덕처럼 느껴졌다. 나는 기상의 웅장함과 잔약함은 체구의 크고 작음에 있지 않다는 것을 빌소 깨달았다.

참판 오대익(吳大益)*은 공의 처남이다. 전에 정주(定住)사건으로 옥에 갇혔을 때, 여러 벼슬아치들이 "경삼의 사건을 공은 어떻게 아뢰려고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공이 침묵을 지키자, 여러 벼슬아치들은 "혐의가 있는 처지라서 공도 감히 원한을 풀어주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서로 말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에 희정당(熙政當)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여 오공(吳公)의 억울함을 아뢰는데 그 말소리가 지붕의 기와가 흔들릴 정도로 컸다.

 

공이 계속하여 말하기를 "대신의 입장으로 혐의스런 처지 때문에 아경(亞卿)의 죽음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얼굴빛을 고치고서 칭찬하였다.

 

이날 공이 오공의 사건을 아뢰는 것을 본 사람들은 기가 위축되어 혀를 내두르면서 공의 의기(意氣)를 장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오공은 죄를 감하여 처벌을 받게 되었다.

병진년(1796) 정사년(1797) 사이에 소릉(少陵)*이 문을 닫고 한가히 지내자, 간사한 무리들이 번옹과 그에게 틈이 생겼다고 말을 지어내어 몇달 사이에 여러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벌렸다.

 

공에게 그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공이 입을 다문 채 답변하지 않자, 많은 사람들이 더욱 근거없는 말이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마침 정월 보름날 밤에 권엄과 이정운(李鼎運)* 등 여러 벼슬아치들이 함께 다리밟기를 하러 가자고 청했는데, 공은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밤 이고(二鼓)에 은밀히 사람을 보내 소릉을 부렀다.

 

그리고 함께 광통교(廣通橋) 위에 나가 병풍을 치고 고기를 구워놓고 사이좋게 마주 앉아 술과 농담을 나누며 새벽종 칠 때까지 머물렀다.

 

이때 온 성안의 구경꾼들과 아전들이나 시정(市井)의 유생, 놀이패 들이 모두 와서 엿보고는 돌아가면서 말하기를 "두 시람 사이에 틈이 생겼다는 말은 한갓 거짓말이었구나" 하였다.

 

그 다음날 소문이 퍼져 벼슬하는 집안마다 모두 알게 되었고 임금에게까지 알려지자 말을 지어낸 사람들이 시들해졌다.

 

그후 며칠이 지나 경모궁(景慕宮)에서 임금을 알현했을 때 소릉은 쓸 만한 사람이라고 힘껏 추천하였으니, 그의 덕량(德量)이 이러했다.

 

 

*이유경: 영조 24(1748)~? 자는 이선(而善), 본관은 함평, 정조 23년 참판에 이르고 순조 7년 (1807) 강릉부사를 지냈다.

*권엄: 영조5~순조1(1729~1801. 자는 공저(公著), 호는 섭서(葉西), 본관은 안동으로 병조판서를 지냈다. 신유교옥(辛酉敎獄) 때 천주교 신자에 대한 극형을 주장했다.

*오대익: 영조 5(1729)~? 자는 경삼(慶參). 벼슬은 참판에 이르렀다.

*소릉: 이가환(李家煥,1742~1801)의 호. 자는 정조(庭藻), 호는 정헌(貞軒).금대(錦帶), 본관은 여주. 공조판서를 지냈다.

*이정운: 영조 19(1743)~? 이익운(李益運)의 형으로 자는 공저(公著), 호는 오사(五沙), 벼슬은 판서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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