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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노트,독서HAZA365>/독서노트-2016년

<책속글귀>세종의 서재 中(by 주부독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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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글귀
#세종의 서재



세종이 잠저 시절 경미한 병을 앓을 때도 독서를 그만두지 않았고, 태종이 젊은 환관을 시켜 책을 모두 가져가게 하고 <구소수간>만 곁에 두게 했는데 그것마저 다 읽었다는 일화를 덧붙여 두었다. <국조보감>의 기록은 <세종실록>의 기록을 토대로 한 것이다.
서거정의 <필원잡기>에는 세종이(구소수간>을 백번, 천번 읽었다고 되어 있다.
 
임금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세자로 있을 때 항상 글을 읽되 반드시 100번씩을 채우고,<좌전>과 <초사>같은 것은 또 100번을 더 읽었다. 일찍이 몸이 불편할 때에도 역시 글 읽기를 그만두지 않았으니, 병이 점차 심해지자 태종은 내시를 시켜 갑자기 책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오게 했다.

그리하여 다만 <구소수간>한 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는데, 임금은 백번, 천번을 읽었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날마다 경연을 열어 제왕으로서의 공덕은 백왕 중에서 높이 뛰어났다. 일찍이 근신에게 이르기를 "글 읽는 것이 가장 유익하니, 글씨를 쓴다든지 글을 짓는 것은 임금이 유의할 필요가 없다."라고 했다. 만년에 기력이 줄어 비록 조회는 보지 않았으나, 문학에 관한 일에는 더욱 유의하여 유신 儒臣에게 명하여 국 局을 나누어 설치해서 모든 책을 편찬케 했으니. <고려사>.<치평요람>.<역대병요>.<언문>.<운서>.<오례의>.<사서오경음해四書五經音解>등이 모두 직접 재단을 거쳐 이루어졌는데. 하루 동안에 열람한 것이 몇십 권에 이르렀다.
 


(...)
한편<명종실록>의 1546년(명종 1. 병오) 6월9일(갑오) 기록에는 조강에서 특진관 신영이 세종의 미담을 들어 부지런히 학문할 것을 아뢴 기사가 있다.

세종은 지나치게 학문을 부지런히 하시어 심신을 손상하게까지 되시니 태종께서 서책을 거두도록 명하셨습니다. 우연히<구소수간>이 어안 御案에 놓여 있었는데 이는 구양수와 소식의 서찰로 정회 精悔를 쓴 것일 뿐 무의 文意가 웅장하고 심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세종께서는 성심으로 학문을 좋아하셨으므로 천번이나 읽으시어 지금껏 미담으로 전하니다. 전하는 깊이 생각하소서.


(....)
두인걸의 <구소수간> 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과거 시험 때문에 이익과 녹봉을 추구하는 공부가 흥기하면서 부터 100가지 기예가 모두 폐했으니, 이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라서 괴이할 것이 못된다. 무릇 문장을 짓느라고 필묵을 사용하는 것이 사군자가 중시할 일이 못되지만, 만일 장수가 군사를 쓸 때 깃발, 표지, 징, 북 따위가 없다면, 어떻게 보고 듣는 이들을 놀라게 하겠는가? 척독의 경우는 기예의 가장 말단이다. 옛사람들은 서른 자의 짧은 서간도 반드시 초고를 일으켰으니, 어찌 맛이 없었던가? 지금 신간<구소수간>의 수백 편을 보고 반복해서 읽으니, 이른바 "성경을 볼 뿐이고 문자는 보지 않는다". 대개 기이함에 마음을 두지 않고도 그 때문에 기이하게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근대의 양성재 楊誠齋(양만리)와 손상서孫尙書의 계찰啓札은 포장鋪張 착종 錯綜 욕담 縟掞하지 않는 것이 없되. 그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근원을 찾아보면, 역시 두 노인의 이의理意로부터 나온 것이다.무릇 의 意란 글의 장수요. 이理는 장수의 보좌다. 의와 이가 바르면 어사語辭도 이에 따르고 길러진다. 이른바 "물고기가 용을 따르느 것 같게 되어, 하늘에 솟구치고 셈에 숨어들어 팔표를 옆으로 찢는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나는 또한 임진년에 북쪽을 강을 건너 온 이래로 후생과 만학의 시문이 왕왕 모두 옛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을 오랫동안 괴이하게 여겼으니, 어째서인가? 과거가 없기 때문이었다. 학자가이 이 간극을 틈탄다면 무슨 기예인들 진부하지 않겠는가? 또 간독簡牘과 계찰에 그칠 뿐이겠는가? 아마도 우리 왕조가 면절綿蕝한 이후에 한나라와 당나라에서 인재를 취하던 법이 수립된다면 이럴 겨를리 없을 것이니, 부디 여기에 뜻을 돈독히 하기를 바란다.
-진지헌노인 眞止軒老人 두인걸이 서문을 쓰다.

세종의 서재 中    -박현모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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