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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필사

​​​::목민심서[12부] 해관(解官)6조-6. 훌륭한 수령은 떠난 후에도 사랑이 남는다[遺愛]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목민심서[12부] 해관(解官)6조 ​ 6. 훌륭한 수령은 떠난 후에도 사랑이 남는다[遺愛] 돌에 새겨 덕을 칭송하여 오래도록 보여주자는 것이 이른바 선정비(善政碑)이다. 속으로 반성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것, 이것이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 송선(宋宣)이 포천현감이 되었는데, 그곳은 전정(田政)이 잘 다스려지지 않아서 토호들의 토지 겸병(兼倂)이 성하여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 그가 한결같이 법으로 다스리자 토호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3개월 만에 물러나게 되었는데, 백성들이 유애비(遺愛碑)를 세웠다. 정언황(丁彦璜)이 안동부사로 있다가 병 때문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자 그곳의 유생과 아전, 백성들이 유임하기를 청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자 비를 세우고.. 더보기
​::목민심서[12부] 해관(解官)6조-​ 6. 훌륭한 수령은 떠난 후에도 사랑이 남는다[遺愛]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목민심서[12부] 해관(解官)6조 ​ 6. 훌륭한 수령은 떠난 후에도 사랑이 남는다[遺愛] ​ 죽은 뒤에 사모하여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면, 그 수령에 대한 백성들의 사랑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 김희(金煕)가 남원부사가 되어 백성을 자식같이 여기고 송사(訟事)의 판결을 물 흐르듯이 하여 재직 몇년 만에 온 고을이 편안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병에 걸려 관아에서 죽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기일에 항상 제사지내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김계희(金係熙)가 나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고 학교 교육을 크게 진흥시켰다. 그가 떠난 뒤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더니, 그가 죽자 어버이처럼 장사지내고, 기금을 만들어 매년 기일에 고을 사람 모두가 모여 명륜당에서.. 더보기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목민심서[12부] 해관(解官)6조 ​ 5. 수령의 재임중 사망[隱卒] ​ 병들어 누워 위독하게 되면 마땅히 곧 거처를 옮길 것이요, 정당(政黨)에서 운명하여 다른 사람들을 혐오스럽게 해서는 안된다. ​ 정당은 공당(公黨)이다. 만약에 불행히 정당에서 죽는다면 후임자가 싫어할 것이며 요사스런 말이 분분하게 일어날 것이다. 수령은 병이 들어 눕게 되거든 스스로 병의 정상을 헤아려 깊이 우려되는 바 있으면 마땅히 곧 책방(冊房)으로 옮겨 거처할 일이요, 병을 참고 누워 버티는 것을 미덕으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다. 옛어른들처럼 확고한 정신수양이 되어 있는 사람은 꼭 꺼려하지는 않겠지만, 나의 도리로서는 정당에서 죽는 것은 마땅히 삼가고 피해야 할 것이다. ​ 이위국(李緯國.. 더보기
::목민심서[12부] 해관(解官)6조 5. 수령의 재임중 사망[隱卒] ​ ::목민심서[12부] 해관(解官)6조 5. 수령의 재임중 사망[隱卒] ​ ​ 재임중에 죽으매 고결한 인품이 더욱 빛나서 아전과 백성이 애도하여 상여에 매달리어 울부짖고 오래도록 잊지못하는 것이 어진 수령의 뜻있는 죽임이다. ​ 곽은(郭垠)이 담양부사(潭陽府使)가 되어 요역과 부세를 가볍게 하여 정사가 맑고 인자하였다. 그런데 재직중에 갑자기 죽으니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며 술과 고기를 끊고 조문하였으며, 상여가 떠나는 날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선비와 백성들이 서로 의논하여 해마다 기일이 돌아오면 쌀을 모아 재(齋)를 올려서 명복을 빌었다. 또 곽씨 집안의 문집에는 "어물장수가 '담양 백성들이 반드시 사먹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며 담양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 곽은의 상여가 돌아가려 할 때에 집기.. 더보기
::목민심서[12부] 해관(解官)6조-4. 수령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청원[乞宥] ::목민심서[12부] 해관(解官)6조 4. 수령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청원[乞宥] ​ 수령이 형식적인 법규에 걸린 것을 백성들이 슬프게 여겨 임금에게 호소하여 그 죄를 용서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옛날의 좋은 풍속이었다. ​ 공적이 있네 능력이 있네 해도 천하에서 백성을 다스려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진정 백성이 수령을 사랑하고 받드는 정이 진실하고 거짓이 없어 호소하는 소리가 몹시 슬퍼 감동할 만하면, 비록 수령이 지은 죄가 깊고 무겁더라도 그냥 용서해줌으로써 백성의 뜻에 따르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요즘에는 붕당(朋黨)이 이루어져 넘어뜨리고 모함하여 한번 배척을 당하면, 그 죄를 용서해줄 것을 비는 백성도 역시 법망에 걸려들어 죄가 헤아릴 수 없게 된다. 때문에 백성들은 수령의.. 더보기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목민심서[12부] 해관(解官)6조 ​ ​3. 수령을 유임하도록 하는 청원[願留] ​ 백성들이 애모하고 그 명성과 치적이 뛰어나서 한 고을에 재임(再任)하게 된다면 이 역시 역사책에 남는 영광이다. ​ 고려의 최척경(崔陟卿)이 제주목사가 되어서 백성에게 이로운 일을 많이 하고 폐단을 제거하니 백성들이 모두 편안히 여겼다. 그가 떠나게 되자 제주 사람들이 난을 일으켰다. 전라 안찰사(按察使)가 "제주 사람들이 제주목사와 그 부하들이 포악하고 괴롭혀 반란을 일으켰고, 만일 '최척경을 제주목사로 삼을 수 있다면 병기를 버리겠다'고 합니다."라고 급히 아뢰니, 임금이 재상에게 "이같이 어진 이가 있는데 어찌 등용치 않으리요"라고 말하고, 그를 불러 비단을 내리고 즉시 제주목사.. 더보기
::목민심서[12부] 해관(解官)6조-3. 수령을 유임하도록 하는 청원[願留] ::목민심서[12부] 해관(解官)6조 -3. 수령을 유임하도록 하는 청원[願留] ​ ​3. 수령을 유임하도록 하는 청원[願留] ​ 수령이 떠나는 것을 매우 애석히 여겨 길을 막고 유임을 원하는 일은 역사책에 그 광휘(光輝)가 전해져 후세에 빛나는 것이니, 이는 겉시늉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 유철(兪㯙)이 예천군수(醴泉郡守)로 부임한 지 얼마 안되어 고을이 잘 다스려지고, 보리 한 대궁에 두 이삭이 나는 상서로운 일이 생겼다. 그가 사임하고 돌아갈 뜻이 있어서 부모를 뵈러 가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고을 사람들이 날마다 그의 집 앞에서 가서 돌아오기를 청하였다. 그가 "고을에 관아의 물건들을 사사로이 쓴 사람이 많은데, 내가 채찍질하고 독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사임하려 한다"고 말하자,.. 더보기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제12부 해관(解官)6조 ​2. 돌아가는 행장[歸裝] ​돌아올 때 떳떳치 못한 물건이 하나도 없이 맑고 소박함이 옛날과 같은 것이 으뜸이고, 방편(方便)을 마련하여 종족들을 넉넉하게 해주는 것은 그 다음이다. 정선(鄭瑄)은 말하였다. "자기의 포부를 들어서 천하의 백성에게 베푸는 것을 사업(事業)이라 하고, 일가(一家)의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산업(産業)이라 하며, 천하의 사람들을 해쳐서 자기 일가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을 원업(寃業)이라 한다. 산업으로 사업을 삼으면 사람들이 원망하고, 산업으로 원업을 지으면 하늘이 죽일 것이다." 정선은 또 말하였다. "의롭지 못한 재물을 많이 얻으면서 생긴 원한의 빚을 자손에게 갚도록 하는 것은 복이 아니다. 조상이 사당을 세.. 더보기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목민심서[12부] 해관(解官)6조 ​ 2. 돌아가는 행장[歸裝] ​ 상자나 농은 새로 만든 것이 없고, 구슬과 옥, 옷감은 그 지역 산물이 없어야 맑은 선비의 돌아가는 행장이다. ​ 제주목사로 있던 이약동(李約東)이 돌아갈 때 가죽채찍 하나만 가졌을 뿐이었는데, "이 역시 제주도의 물건이다"라고 말하고 관아의 문루(門樓)에 걸어두었다. 제주도 사람들이 그 가죽채찍을 보물처럼 보관하여, 목사가 새로 부임할 때마다 내어 걸었다. 세월이 흘러 채찍이 낡아버리자 고을 사람들이 처음 채찍을 걸었던 곳에 그 사적을 그림으로 그려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냈다. ​ 이약동이 바다를 건너올 때 배가 넓은 바다 한가운데서 갑자기 기울고 맴돌아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다. 그러자 그가 "나의 .. 더보기
​::목민심서[12부] 해관(解官)6조-​2. 돌아가는 행장[歸裝] ​::목민심서[12부] 해관(解官)6조-​2. 돌아가는 행장[歸裝] 2. 돌아가는 행장[歸裝] ​ 맑은 선비의 돌아갈 때의 행장은 모든 것을 벗어던진 듯 조촐하여 낡은 수레와 야윈 말인데도 그 산뜻한 바람이 사람들에게 스며든다. ​ 고려 유석(庾碩)은 안동부사(安東副使)로 있을 때 선정이 많았는데, 최이(崔怡)와 송국첨(宋國瞻)에게미움을 받아 무함을 당하여 암타도(巖墮島)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떠나는 날 늙은이와 어린이들까지 길을 막고 "하늘이여! 우리 사또에게 무슨 죄가 있나요? 사또가 가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하고 울부짖으며 가지 못하게 붙들었다. 호송을 맡은 군졸들이 꾸짖고 고함을 쳐서야 길이 열렸다. 그의 부인이 자녀를 거느리고 돌아가는데 사사로이 준비할 말이 세 필뿐이라 걸어가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