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노트>/독서노트-2016년

독서노트- 희망의 인문학

728x90

 

​<희망의 인문학>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富)가 행복의 조건이 되어가는 경향이 있다.
경제적인 부(富)가 행복의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라 생각된다.
부자라고 해서 모두 행복하며 가난하다고 해서 모두 불행하겠는가.
 
진정한 부는 내적인 것에서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자유로움은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할수 있으며,
자유로운 영혼을 가짐으로써 행복은 더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이러한 자유로움은 교육을 통한 인문학적소양을 기르는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인문학적 소양을 통해 자신의 옳바른 판단력을 기르고,
스스로 내린 판단에 따른 표현을 하며 행동하는 것은
우리의 운명까지도 바꿀수 있을것이란 생각이 든다.​
인문학 교육을 통한 삶의 질을 향상시키며 보다 행복한 삶을 영위해나갈 날을 기대해본다.
희망의 인문학으로 들어가보도록 하자.​
 
 
 
고등교육기관이 교육하는 곳에서 준비시키는 곳으로 전략해서 인문학 교육을 완전히 포기하기 이전에도 교육이라는 것,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저 잘 사는 사람들의 일일 뿐이었다. 록펠러 가문(지금으로 치면 빌 게이츠 가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의 자손들은 당연히 역사와 예술, 문학과 철학에 관한 잘 알고 있어야 했다.
오늘날에도 그들이 받는 학교교육은 더 복잡하고, 덜 반복적인 일을 하는 데 적합한 교육관정으로 구성돼 있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대개 머리를 덜 써도 되는 단순한 작업을 이한 훈련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받는 보수는 가령 거리 한 모퉁이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사람들의 벌이보다도 늘 적을 수밖에 없었다.  -p33
 
 
국가가 어떤 이유에서든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에 관심을 두게 될 때마다 쓰는 방법은 항상 똑같았다. '훈련'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프로그램은 가난한 이들에게 옷을 제대로 입는 법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또 어떤 프로그램은 일찍 일어나는 습관 같은 것을 길러주기도 한다.
1996년의 개혁복지법이 제안한 프로그램들을 포함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지정책의 대부분이 당근과 채찍을 사용해 그들을 '훈련'시카는 방식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복지정책이 이런 식으로 흐르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란 일반인들과는 뭔가 다른 존재, 즉 능력이 부족하거나 별 가치가 없는 사람들, 또는 이 두 가지 문제를 모두 가진 존재라는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훈련'이 아닌 '교육'을 하겠다는 발상 자체를 가닻찮게 여길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훈련시켜야 한다. 훈련이라도 제대로 감당할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바로 그들의 생각이다.
이런 편견에 기초한 복지정책은 그 사회에 매우 분명한 이득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쥐꼬리만한 임금으로 부려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난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시키면서 말이다.
 
이것보다는 조금 덜 분명하지만 '힘power'의 배분과 관련해 가난하지 않는 사람들이 누릴수 있는 또 다른 사회적 이득이 있다.
교육받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조차도 다른 사람들과 공평하게 힘을 나누어 가질 만한 경제력도, 지적 능력도 없다.
그래서 인문학을 부자와 중산층이 독점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으로 만들어 놓은 채, 그저 훈련만 시킴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계속해서 순종적인 사람들로 묶어놓는 것이 가능해진다.
가난한 사람들이 때때로 물건을  훔치거나 심지어 다른 사람을 해치는 사건(이것도 대개는 그네들 사이에서 발생한다)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교육받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이 세력가들에게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위협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인문학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치는지, 왜 가난한 사람들도 인문학이라는 '부 富'를 누릴 권리가 있는 것인지,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일이 왜 전체 사회에도 좋은 일이 되는지 등과 같은 질문에 답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가난을 바라보는 기존의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  -p34
노동을 통해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사회복지를 끝내기 위한 정당한 대안을 원한다면 노동을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해야 한다.
물론 빈곤에 대한 가장 큰 해독제가 '노동'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빈곤의 포위망 안에서 하는 노동은 무질서하기 짝이 없다.
그런 식의 노동은 또 다른 무력을 낳게 되고, 포위망 안의 혼돈은 점점 더 심해져 간다.
노동자들은 반항적이지는 않지만 제멋대로여서 다루기가 힘들다.
도덕성이라는 마음의 틀은 절제에서부터 만들어지는데, 혼돈은 절제된 상태가 아니다.
따라서 혼돈의 결과도 도덕적일 수 없다.
빈곤의 문화에서처럼 빈곤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 속에 존재하는 무력은 다른 종류의 해독제를 필요로 한다.
그 안에 노동이 포함되기는 한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제한이 없고 지나치게 희망적이지만 실상은 착취의 요소를 감추고 있는 '노동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름이나 나태함이 아니라 무력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무력에 대한 해독제가 발견된다면 노동은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자연스레 뒤따르게 될 것이다.
-p117
사실 가난을 벗어나는 길은 많이 있다. 가난이 무엇인지 정말로 아는 사람은 일자리나 돈의 문제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돈이란 그저 '많고 적음의 양적인 문제'일 뿐이며, 노동이란 신이 자기 자신을 이해 만든 '만병통치약'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한때 가난을 경험해봤던 사람들이나 현실세계를 '은유'해놓은 곳(즉, 교도소)에서 사는 사람들은 현대  사회의 작동 기제인 '게임의 법칙'이란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는 ㅅ실, 그리고 정치라는 것 또한, 경제나 '신분 과시'와는 달리, 경쟁이 안라 공적 세계에서 권력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p171
그러나 한가지,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할 수 있게 했던 것이 바로 '교육'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비니스는 교육을 통해서 자신의'인간'으로서의 그릇 크기가 어느 정도까지 커갈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비니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정치가 탄생했던 과정과 똑같은 길을 걸어 왔다.
그녀는 성찰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것은 이후 계속된 대화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었는데, 그녀가 말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은 바로 인문학을 의미했던 것이다.
인문학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자연의 경이로움을 제대로 경험하기 위해서 자연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자연을 관조하기 시작한 이래로 줄곧 세상 사람들의 성찰적 사고를 가능하도록 해준 근본적인 원칙으로 가능해왔던 것이다.
정치적 삶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길이라면, 인문학은 성찰적 사고와 정치적 삶에 입문하는 입구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가난에서 해방시켜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그런 탈출구는 진작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찰적 사고와 정치에 이르는 길을 열어 제치려면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삶을 준비하는 과정 간의 차이가 제거돼야 한다.
그리고 현대 사회를 작동하는 '게임의 법칙'(사실 이것은 미국의 탄생과 함께 미국 사회를 지배해온 사회 작동 기제이다​.)은 평등과 동등한 대화를 촉진시킬수 있는 법칙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일들이 가능하려면 가난한 이들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개혁해야 한다.
-p173​
클레민트 코스가 시작된 바로 그 첫해는 실수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고자 하는 일에 하나의 전형을 만들어낸 것만은 분명하다.
비록 이 코스가 개정을 거듭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방향과 틀까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수강생들로 하여금 공적인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하고, 가난한 탓에 겪는 고립에서 벗어나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교육 목표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는 말이다.
클레멘트 인문학 코스는 여러 학문분야를 통합한 형태의 대학 수준의 강좌인데, 교수 방법으로는 여전히 소크라테스식 방법론이 활용되고 있다.
이렇게 핵심 부분에 있어서는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막 tl작된 첫해의 경험이라고 할지라도 가령 5년뒤에 코스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유용할 것이며,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인문학이 가지는 교육적인 가치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생생한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p204
클레멘트 인문학 코스에는 필수과목이라는 것이 아직은 없지만 앞으로는 필요할 것 같다.
대체로 페트라르카의 방식을 쫓아 철학, 문학, 예술, 역사, 논리학 등으로 구성돼 있다.
그런데 인문학에 대한 페트라르카의 이 존경할 만한 접근방식은 클레멘트 코스를 시작하고 처음 5년 동안에 약간 수정되었는데,​ 특히 마지막으로 언급한 논리 영역에서 주로 변호가 생겼다.
철학을 전공했거나 직업적 경험을 통해 성장한 철학자들인 로버트 마친과 마틴 캠프너는 논리학을 별도 영역으로 가르치려는 생각에 반대하면서, 차라리 그 과목을 없애고 문학 영역을 시와 산문으로 나눠 가르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시애틀에서는 라이올 부시가 논리학에 대한 대안으로 '비판적 사고'라는 과목을 개발했고, 수잔 와이서를 비롯한 몇몇 과목 담당자들은 논리학을 '글쓰기'시간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나는 몇 달 뒤 미구엘 앙헬 마이 마이와 함께 이 작은 마을로 돌아왔다.
미구엘은 그날 밤 수업을 맡았는데, 마야어의 어려운 음성에 집중하면서 수업을 시작했다.
억양의 높낮이, 발음의 정지와 시작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그는 돌 위에 동전을 떨어뜨리거나 벽돌을 맞부딪치거나 나무토막을 이용했다.
학생들은 미구엘이 제시한 사례를따라 발음 했다.​
그 동안 농장주들이 엉망으로 쓰던 발음은 사라졌다.
학생들은 이제부터 매끄러운 마야어로 말하게 된 것이다.
다른 어느날은 학생들과 함께 에네켄 농장을 돌아보고 온 후에 직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젊은 여자들 가운데 한 학생이 자신은 메리다 지역에 있는 어느 메스티소 가족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을 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자기에게 터무없이 낮은 임금을 주었고, 주인집 식구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먹어야 했으며, 때때로 자행되는 구타와 시도 때도 없는 잔소리에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그것은 두렵고 모욕적인 시간이었다.
"이 코스를 마친 다음 다시 그 집에서 가정부로 일을 할 겁니까?"
내가 물었다.
그때는 마야어로 진행된 클레멘트 코스를 운영한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는데,
그 여학생은 '당신 제정신이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야인입니다." -p401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