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근담
한적
한적閒適에는 그 기인하는 것이 마음과 외부 환경의 구별이 있다.
외부 환경의 한적이란 시끄러운 저잣거리에서 멀리 떨어진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마음의 한적이란 외부 환경이 어떠하든지 설혹 군사와 말이 분주히 오가는 가운데 있거나 장부와 문서가 복잡한 처지에 있더라도 마음속의 여유를 잃지 않고 한 점의 번뇌 煩惱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의 한적을 취하느냐 외부 환경의 한적을 취하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의지와 능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람이 이 세상을 살면서 한적한 취미를 모르면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사물의 부림을 받아 번뇌 투성이의 괴로운 생활을 하게 될 뿐이다. 그러니 어찌 세계 밖의 세계에 서서 모든 일을 마음대로 주름잡는 힘차고 당당한 걸음을 걸을 수 있으며 티끌 하나 묻지 않은 크나큰 쾌락을 누릴 수 있겠는가.
1
기를 수 있는 용龍은 진짜 용이 아니며 잡아둘 수 있는 호랑이는 진짜 호랑이가 아니다. 그러므로 작위와 봉록은 영예와 출세를 바라는 자들을 먹여 살리기는 하지만 욕심이 없고 깨끗한 무욕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잡아 두지는 못한다. 가혹한 형벌은 영화와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효과가 있지만 표연히 세상 욕심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2
초연한 늙은 학은 비록 굶주린다 하더라도 마시고 먹는 태도에 여유가 있으니 닭이나 오리처럼 악착스럽게 먹을 것을 가지고 다투지를 않는다. 고고한 소나무는 비록 늙은 고목이 되더라도 제 모습을 지니고 있으니 복숭아나 오얏나무처럼 화려한 꽃으로 아름다움을 다투지 않는다.
3
꽃과 버들잎이 난만한 때에 우리의 마음이 흡족하고, 생황笙篁과 노랫소리가 높이 울리는 곳에서 흥취를 얻지만, 이것은 우주 조화가 만들어낸 환영에 불과하며 사람 마음속의 방탕한 생각이다. 나뭇잎이 떨어지고 풀이 마른 뒤에 소리가 거의 없고 맛도 담박한 곳에서 또 하나의 소식消息을 듣게 되면 이것이야말로 우주건공宇宙乾坤의 이치를 깨닫는 관건關鍵이고, 사람과 사물의 근본이다.
4
사람의 육신이 유한하다는 이치를 깨달으면 이 세상의 온갖 부질없는 인연이 저절로 사라지고, 깨달음을 얻어 욕망을 품지 않는 경지에 이르면 마음이 달과 같이 밝아진다.
5
흙바닥에 돌베개를 놓고 싸늘한 집에서 이불을 덮고 잘 때는 그 꿈결도 역시 상쾌하다. 보리밥에 콩나물국으로 간소한 식사를 하고 젓가락을 놓으면 입안이 향기롭다.
6
분잡하고 화려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분잡하고 화려한 것을 보고는 기뻐하는 경우가 있으며, 담박談泊한 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실제로 담박한 곳에 가면 싫어하는 경우가 있다. 모름지기 혼탁함과 담박함을 구분하지 않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없애버려야 분잡하고 화려한 것을 잊을 수 있고 담박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7
부귀富貴한 사람이 일생 동안 누린 영화는 죽음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연연하는 마음이 생겨 마치 무거운 짐을 지는 것과 같다. 빈천한 사람은 일생 동안 겪은 청렴한 고난은 죽음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혐오를 벗어나 마치 무거운 형틀을 벗는 것과 같다. 진실로 사람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마땅히 탐욕과 애착을 향한 고개를 급히 다른 데로 돌리고 근심과 고통으로 찡그린 눈썹을 얼른 펴야 할 것이다.
8
사람의 일생은 큰 창고에 든 한 알의 쌀과 같고 눈앞에서 번쩍이는 번갯불 같고, 낭떠러지에 걸려 있는 썩은 나무와 같고, 바다에 출렁이는 큰 파도와 같다. 이러한 실상實相을 깨달은 자는 어찌 슬피지 않고 즐겁지 않겠는가. 또 어찌 그러한 실상을 깨닫지 못하고서 여전히 삶을 탐구하여 근심하는 마음을 품을 것이며, 어찌 그러한 자각自覺을 존중하지 않고 헛된 삶의 부끄러움을 남길 것인가.
9
동해東海에 이는 파도가 일정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세상일에 대해 분개할 일이 무엇이 있겠으며, 북망산北邙山에는 빈 터가 남아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인생에 찡그릴 일 또한 하나도 없다.
10
천지天地도 쉬는 일이 없고 일월日月도 쉬지 않고 차고 이지러지는데 하물며 구구한 인간 세상에 있어 어찌 모든 일이 다 원만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언제나 한가로울 수 있을 것인가. 다만 바쁜 가운데서 일시적이나마 여유를 구하고 부족한 곳에서도 만족할 줄을 알면 부리고 따르는 것이 내게 달려 있게 되어 활동과 휴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만물의 조화로도 나에게 일함과 쉼을 논하지 못할 것이며 이지러짐과 가득 참을 비교하지 못할 것이다.
11
깨달음은 먼 곳에 있지 않고 취흥趣興을 얻는 데는 많아야 되는 것은 아니다. 쟁반만한 연못이나 주먹만한 돌에도 만 리의 산천山川과 같이 웅대한 형세가 있고, 짤막한 말에도 먼 옛날 성현聖賢의 마음이 완연히 나타나 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훌륭한 선비의 안목이고 통달한 사람의 마음이다.
12
초연한 태도나 한가한 마음은 오직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니 어찌 겉모습을 꾸미겠는가. 청아한 외모와 의젓한 기골氣骨은 남의 관심을 바라지 않으니 쓸데없이 연지를 바를 필요가 없다.
13
누추한 집에서 한가하게 살면 보고 듣는 것은 한정되더라도 그 정신은 절로 광활해진다. 산골 늙은이와 사귀면 예의禮儀나 교양敎養은 비록 수준이 낮다 하더라도 그 생각은 항상 진실하다.
14
만물의 조화造化를 어린아이처럼 가볍게 여겨 어떠한 경우라도 그 조화에 희롱당하지 말 것이며, 천지天地를 커다란 흙덩어리로 여겨 내 손 안에 넣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