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인간은 왜 공감이 필요한 것일까?
위험과 불확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존재하기 위해 인간은 끝없이 예측해야 한다.
내 행동이 적절한 것일까?
갑에게 나는 '을질'을 잘 하고 있는 것일까?
내 아래 을에게 '갑질'은 잘하고 있는 것이지?
1시간 후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내일은? 다음 주에는? 내년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는 수많은 질문에 인간은 확신이 필요하다.
확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나에게 확신해줄 수 있는 '나'는 단 한 명뿐이다.
그렇다면 더 만은 '나'를 만들어본다면?
나와 공감하는 나의 친구들은 어쩌면 나의 '아바타'일 수도 있겠다.
키케로도 말하지 않았던가, "친구는 또 하나의 나"라고 ,
먼 옛날 아늑하고 작은 동아 프리카 숲을 등지고 지구를 정복하기 시작한 인간,
새롭고 넓은 세상에서 발견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불안함과 무의미로부터,
우리는 어쩌면 '친구'라는 또 하나의 나를 통해 구원받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30대가 되면 우리는 진정한 친구를 원한다.
그리고 40대가 되면 친구도 역시 사랑고 같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운명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생각과 선택의 꼬리물기이다.
선택과 생각은 뇌로 하는 것이고, 뇌는 수천억 개 신경세포들의 합집합이다.
그 수많은 신경세포들을 단순히 '내가 원한다'라는 의지 하나로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매우 순진해 보인다. 완벽한 자유의지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물질적 실체를 가진 신경세포는 자연의 법칙을 따른다.
하지만 인간의 선택이 단순히 과거와 현재의 법칙을 통해 완벽히 정해진다는 결정론적 주장 역시 라플라스의 착각에 불과하다.
이런 가설을 세워볼 수 있겠다.
당구공 같은 하나의 이유가 다른 당구공을 치는 것과 같은 기계적 인과관계는 인생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선택은 수많은 요소들(물리법칙,유전,경험,학습,우연...)로 구성된 '선택의 풍경을 통해 확률적으로 만들어진다.
선택의 틀은 정해져 있지만, 선택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완벽한 '자유의지'를 통한 완벽한 '선택의 자유'가 존재한다고 믿을까?
어쩌면'나'라는 존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들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선택이라는 실질적 점들을 연결해 그린 가상의 '선'이 바로'나'라는 존재이며, '나'라는 허상은 '선택의 자유'라는 그럴싸한'스토리'를 통해 자기 존재를 정당호하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선택들을 연결한 가상의 선이 바로 '나'라면, 어쩌면 인류의 모든 선택들을 연결한 가상의 선이 '운명'일 수도 있겠다. 이란 말도 기능하겠다.
운명은 존재의 본질적 우연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약한 인류가 다 함께 꾸는 하나의 꿈이라고.
<삶은 의미 있어야 하는가> 인생에 절대적인 의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반가운 것일까?
의미가 있다는 것은 내 삶에 정해진 목표와 용도가 있다는 말이다.
나에게 용도가 있으면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인생은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무언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나는 망치이고, 망치이기에 벽에 못을 박아야만 한다.
의미 있는 인생은 존재의 무거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생이다.
그렇다면 '나를 위한 인생'은 인생에서 절대 의미를 뺀후부터 가능해진다.
삶의 의미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존재는 가벼워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가벼운 인생은 쿤데라가 표현하듯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게 한다.
결국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어차피 논리적으로 불가능흔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의미 없는 인생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이다.
<영혼이란 무엇인가>
손톱을 아무리 깎아도 나의 자아는 남아 있다.
손톱이 영혼의 운반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팔이 잘려 바닥에 던져진다면 엄청난 고통을 느끼겠지만, 고통을 느끼는 '나'는 팔과 함께 바닥에 던져지지는 않고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뇌는 다르다.
프랑스 혁명 당시 단두대에서 사형당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머리가 잘리고 산소 공급이 중단되어 모든 것이 끝났을 수 있다. 잘린 목을 바라보는 몸도, 몸을 바라보는 잘린 목도 없다.
기억과 자아는 뇌가 정상 작동하는 동안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뇌가 죽으면 나의 모든 기억들이 파괴되고, 자아가 전멸되며 영혼도 끝난다.
....
인간은 늙으면 약해지고 죽는다.
죽으면 숨이 멈춘다.
숨이 바로 삶이다.
숨은 공기이고, 공기는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지만 존재한다.
벽에 그려진 손자국은 나이고, 나는 곧 나의 손자국이다.
먼 훗날 내 몸이 사라진 후 자식들 눈에 지금 내 앞에 보이는 것과 같은 손자국이 보인다면,
나는 그들의 머리 안으로 들어가 계속 살게 된다는 말이 아닐까?
과학적으로 육체와 분리되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영혼에 대한 가설은 불필요하다.
하지만 인류가 그런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면 예술도, 종교도, 철학도 없었을 것이다.
뽀족한 이빨도, 두꺼운 가죽도 '털 없는 원숭이'에 불과한 인간에게 세상은 끝없이 불안하고 두려운 곳이였을 것이다.
인간의 유일한 무기는 다른 동물들보다 큰 뇌이고, 뇌는 원인을 추구하는 기계이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언인과 인과관계를 추론하려 한다.
천둥은왜 칠까? 밤은 왜 어두울까? 표범은 왜 우리를 잡아먹는 것일까?
내가 보고, 느끼고, 기억하듯 어쩌면 태양도 영혼과 자아가 있어 아침에 뜨기를 원해 세상이 밝아지는 것일 수 있다. 배가 내리는 것도 구름의 영혼이 원해서인지도 모른다.
이제 모든 것이 설명된다.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모든 존재들은 그들만의 의지와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그 영혼들의 마음을 얻으면 우리는 오늘 또 하루를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또한 인류는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영혼은 발명한 것이다.
영혼은 먼 미래에 지구를 정복하게 될 원시시대 인류가 치초로 개발한 '킬러 애플리케이션'이었던 것이다.
김대식의 빅퀘스천 中 -김대식 저
'< 독서노트,독서HAZA365> > 독서노트-2017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 中 -피에르쌍소 저 (0) | 2017.04.13 |
---|---|
김대식의 빅퀘스천 中 -김대식 저 (0) | 2017.04.07 |
자연은 알고 있다 中 -앤드루 비티. 폴 에얼릭 저 (0) | 2017.04.04 |
과학 읽어주는 여자 中 -이은희 저 (0) | 2017.04.04 |
칙센트미하이 flow(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난다)中 -칙센트미하이 저 (0) | 2017.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