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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노트,독서HAZA365>/독서노트-2015년

학교는 통제보다 자율권 보장이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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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볼 때 학교교육은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하나는 흔히 스파르타식이라 불리는 엄격한 훈련 방식으로,

군대식으로 엄격한 규율과 통제 속에서 행해지는 교육방식이다.

반드시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고대부터 주로 엘리트 양성을 위한 교육에서 사용되었던 방식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얼마전 이런 방식으로 운영되는 학교가 설립되어 교육계와 세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오늘날 사관학교가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스승과 제자가 자유롭게 묻고 대답하는 교육 방식이다.

대화, 또는 문답 형식의 교육 방식으로 소크라테스 방식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공자나 맹자도 이 방식을 사용했고, 예수나 부처가 사용했던 방식이기도 하다.

어느 방식이 더 효율적이냐는 학교의 성격과 종류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평화를 위한 교육방식은 반드시 후자여야 한다.

묻는 사람에게 대답해주고, 되묻고 대답을 듣는 이런 방식을 중국에선 학문(學問)이라고 한다.

배울 학(學), 물을 문(問)이다. 묻기를 배운다.

모르는 것을 물어서 배운다는 뜻이다.

배움은 묻는 데서 시작하고, 또 다른 물음으로 나아가기에 끝이 없다.

그래서 학문에는 길만 있지 끝이 없다.

 

스스로에게서 배움이 끝났다고 믿는 사람들-특히 지도자들 가운데 많다-은

환상 속에 있는 것이거나 자기기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고의적 속임수를 쓰는 것이다.

 

묻는 사람에게 대답이 주어진다.
그 대답은 정답이 아니라 해답일 뿐이다.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특히 삶과 신앙, 신념에 있어서는 정답이 없다.

고민하는 사람의 진지한 고민에 대한 해답이 있을 뿐이다.

고민 하나에 대한 해답을 얻고 나면, 다음 단계의 고민이 오는 법이다.

다음 단계의 고민으로이어지지 않는 고민은 고정관념일 뿐 고민은 아니다.

 

고정관념은 삶의 다양한 단계의 경험 중 어느 시점에 머물러버리는 병이다.

자기도 죽이고 남도 죽이는 위중한 병이라 할 수 있다."

 

 

학교교육에서 자율이란,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국가/이사회가 교장에게 학교 운영의 자율권을, 교장이 교사에게 교육 행위의 자율권을,

교사가 학생에게 교육 활동의 자율권을 주는 것이다.

학생  <-- ​교사  <-- 학교   <--국가

 

출처:왜 학교는 불행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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