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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3부, 요국 요순시대의 고적법) -정약용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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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3부

둘째형님께 보낸 편지

 

중국 요순시대의 고적법

上仲氏


 

 

요순 시대의 나라 다스리던 법은 뒷날의 세상에 비교해볼 때 훨씬 엄혹하였으며 물을 부어도 새지 않을 만큼 빈틈없이 짜여 있었다는 것을 요 몇년 사이에 깨달았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요순의 정치는 순박하고 태평하여 천하가 저절로 조화를 이루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치입니다.

 

어리석은 제 소견으로는, 태초에 인간이 태어날 때 모두가 식욕이나 색욕을 지니고 있어 뿌리나 덩굴처럼 온통 악습으로 얽혀 있기 마련인데, 어떻게 저절로 평화로운 세상이 될 수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항상 말씀하시길

"요순시대는 희희호호(熙皞皞)하였다."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것을 순박하고 태평스럽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 같은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희희(熙熙)는 '밝다'는 뜻이고 호호(皞皞 )는 '희다'는 뜻이니, '희희호호'하다는 말은 만가지 일이 모두 잘 다스려져 밝고 환하여 티끌하나 터럭 하나만큼의 악이나 더러움도 숨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요사이 속담에서 말하는 "밤이 낮 같은 세상' 이라는 게 참으로 요순의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순의 세상이 그렇게 된 까닭을 살펴보면, 그것은 오직 고적(考績)* 제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고적제도는 요즘 세상의 여덟 글자* 제목만 있는 고적제도처럼 소루(疏漏)하거나 조략(粗略)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본인을 직접 임금 앞에 나서게 하여 얼굴을 맞대고 자기 입으로 사실을 말하도록 했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거짓으로 꾸며서 말할 수 없었고, 잘한 일이 있는 사람도 겸손을 차리느라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할말을 다 하고 나면 했던 말을 고찰하는 제도[考言之法] 가 있었으니, 고언(考言)* 이라는 것도 고적제도의 한가지입니다. 그 당시 요순시대에 정말 배를 붙잡고 허리를 꺾고서 웃지 않고는 못 배겨 깔깔 껄껄 웃음이 터지는 장면이 있다면, 바로 우(禹)임금이 순(舜)임금 앞에서 자기 입으로 치적을 말하던 광경입니다.

 

제왕이 말씀하시길

"오너라 우야, 너도 창언(昌言)하라"

 

(창언이라는 것은 드러내어 말하는 것이다. 자기 공덕을 드러내어 말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큰 소리로 말하게 하는 것이다-지은이) 하자,

 

 

 

우가 대답하길

"제가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저는 날마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부지런히 힘쓸 것만 생각합니다"

 

(우가 부끄럽고 껄끄러워 자기 일을 차마 얘기하지 못하고 겸연쩍어서 하는 말이 "제가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자신이 한 일 중 단지 큰 부분만 대강 말하면서 "저는 부지런히 일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지은이) 했습니다.

 

그러자 고요(皐陶)*가 탄식하며 말하길

"오오! 어떤 일을 그렇게 부지런했단 말이오"

 

(고요는 정색을 하고 무섭게 책망하길 "고적은 지극히 엄숙한 법이오, 상감이 지척에 계시오. 어찌 감히 이따위로 당황하여 머뭇거리고만 있는 거요. 열심히 일한다고 했는데 그 자세한 내용을 조목조목 상세히 개진하시오"라고 하였다-지은이) 라고 했습니다.

 

우기 말하길

"홍수가 온세상에 넘쳐흘러 산까지 잠기고 언덕을 삼켜 불쌍한 백성들이 우왕좌왕 물에 빠져 있기에 제가 네가지 탈것을 타고 산을 따라가며 나무를 제거하였고 또한 익(益)*과 함께 여러 종류의 고기 먹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익의 이름을 중간에 삽입한 것은 공 功을 나누어 가지려는 뜻이다-지은이).

 

저는 구주(九州)*에 있는 냇물의 물길을 크게 파헤쳐 큰 바다로 물이 빠지게 하였고 저는 논과 밭의 물길 또한 깊이 파서 냇물로 물이 빠지게 하였으며

 

(두번이나 자기를 호칭한 것은 모든 치수 治水는 정말 자기 혼자 한 것으로 남에게 양보할 수 없다는 뜻이다-지은이),

 

또 직(稷)*과 함께 곡식 씨를 뿌리고 어려울 때 먹는 음식과 고기 먹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힘써 바꾸어 갖게 하고, 쌓여 있는 물건을 날라다 팔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곡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으며 온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숨길 수도 양보할 수도 모면할 수도 없어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자기 공로를 남김없이 다 이야기했다-지은이).

 

 

 

이에 고요가

"좋습니다. 당신이 아뢴 말을 모범이 되는 답변으로 삼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기(冀)* 또한 스스로 자기 공적을 아뢰었는데 대단히 장황하고 중언부언하게 늘어놓았습니다.

 

그날 한군데 모여서 이야기를 주고받던 광경을 상상해보면 참으로 그것이야말로 한폭의 생생한 그림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눈을 본 듯 고적하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해줍니다.

 

 

순임금이 주인 자리에 앉아 있고, 그 앞으로 고요와 기, 우와 직이 쭉 앉아 스스로 자기의 치적을 거짓없이 아뢰는 장면은 축복과 은혜가 충만한 당시 위정자들의 절묘한 광경이라 하겠습니다.

 

[서전]의 이 부분을 만약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임금께서 단순히 우의 창언을 듣고자 한 것으로 본다면

 

(요즘 사람들은 창언을 신하가 임금께 올리는 곧은 말이라고 생각한다-지은이)

 

고요가 빨리빨리 하도록 독려하는 과정을 통해 결국 스스로 자랑하고 칭찬하여 자기 공적만 천하에 가득한 것처럼 만드는 것이니, 세상에 어찌 그러한 창언이 있을 수 있으며 세상에 그렇게 염치없는 일이 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동방삭(東方朔)*이나 우맹(優孟)* 같은 사람도 탐탁해하지 않을 일을 우가 과연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정말 잠고대 같은 소리입니다.

 

이로써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二典이전)* 이모(二謨)* 에서 말한 순사고언(詢事考言)*이나 삼재고적(三載考績)*을 말로 아뢰거나 공을 밝게 시험해보는 일 등이 처음부터 끝까지 잘 이어져있고 위아래가 잘 연결되어 있음은 모두가 고적에 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전(典)이라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 법이요, 모(謨)라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정책입니다. 나라 다스리는 근본 법과 정책으로서 이전과 이모의 고전제도보다 더 나은게 없으니, 이것이 바로 요와 순이 이상적인 정치를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순임금께서는 옷소매를 드리우고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진흙으로 만든 점잖은 부처님처럼 근엄하게 앉아 계시기만 했는데 온천하가 저절로 태평스럽게 다스려졌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꿈속을 헤매는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천하는 썩어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 요즘 관리의 포상과 징계에 관한 조항을 보니 "이욕(利慾)의 생각이 없고 화평하고 단아하게 정치를 하여 다스리는 경내가 모두 평안하다"라 했는데

 

이러한 관리로 하여금 순임금 어전에 올라가 스스로 자기 공적을 아뢰도록 한다면,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일을 했다고 아뢸 수 있겠습니까?

 

또 "전통있는 집안에 전해오는 법도를 잘 지키며 화려한 명예를 얻으려 하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이러한 관리로 하여금 순임금의 어전 앞에 올라가 자기 입으로 사실대로 말하도록 고요가 옆에서 호령까지 한다면 도대체 무슨 말을 아뢸 수 있겠습니까?

주(周)나라 때까지도 요순시대의 제도가 있었습니다. "한해가 다할 때쯤엔 육관(六官)*에 회계(會計)가 있다"라고 했는데 이때 회계는 고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秦)나라 때까지 이런 법이 아직 있었으니, 왕계(王稽)*가 하동태수(河東太守)로 있을 때 3년간이나 회계를 올리지 않자 범저(范雎)가 죽어 마땅할 죄라고 했던 것입니다.

 

한(漢)나라 초기에도 군국(郡國)에서 회계를 올렸습니다만 모두가 요순시대의 고적법만 못했습니다. 요순시대에는 직접 면전에서 아뢰도록 하여 무섭고 엄밀했는데,

 

궁중의 내신(內臣)이나 대신(大臣)은 임금이 직접 조사하고 외신(外臣)이나 지방장관은 임금이 순수(順狩)할 때 조사하거나 더러는 임금께 조공을 바치러왔을 때 조사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임금이 말하기를,

"먼 바닷가의 백성에게까지 임금의 덕이 미치게 되면, 온나라의 어진 백성들이 임금의 신하가 되고자 할 것이니, 왕께서는 이들을 등용하여 그들의 말을 널리 받아들이고 그 공적을 밝게 시험하여 수레와 의복으로 상을 주십시오

(공적이 있어 상 주는 것을 용 庸이라 한다-지은이).

 

왕이 이를 널리 펴지 못하면(왕이 널리 살피지 않으면 당파끼리 편들 염려가 있다-지은이) 날마다 거짓 공만 아뢰게 됩니다.(왕이 직접 살피지 않으면 날마다 거짓 공만 아뢰게 된다-지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요순시대 통치수단과 정책의 근본은 고적을 떠나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얼굴을 대면하여 직접 아뢰는 것이 고적법으로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차선책으로는 자신의 공적사항을 기록해서 올리는 일입니다.

 

비록 오늘 같은 더러운 풍속에서라도 스스로 자신의 공적을 아뢰도록 하는 법이 있다면, 수령(守令)의 지위에 있는 사람은 더러는 손발이라도 움직이고 마음을 움직여 아마 한두가지의 일로라도 자기 책임을 메울 공적사항을 뚜렷하게 꾸미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 도탄에서 허덕이는 일이 어찌 요즘같이 심하겠습니까? 아! 그 누가 우리 백성들을 위해 이런 이야기라도 올려바친단 말입니까?

 

 

 

*고적: 관리들의 근무성적을 평가함.

 

 

*여덟 글자: 조선 시대 관리들의 고과평가 항목으로 여덟 글자로 된 조항.

 

이 글의 뒷부분에 나오는 "이욕의 생각이 없고 화평하고 단아하게 정치를 하여 다스리는 경내가 모두 평안하다" (恬雅之治 一境晏知 염아지이 일경안지)

 

"전통있는 집안에 전해오는 법도를 잘 지키며 화려한 명예를 얻으려 하지 않는다" 등의 여덟자를 뜻한다." (故家貴節 不求赫譽 고가귀절 불구혁예)

 

*고언: 관리들의 근무성정을 스스로 말하게 하여 평가함.

 

 

*고요: 중국 고대 순임금의 신하.

 

*익: 중국 고대 순임금의 신하.

 

*구주: 당시 중국 전역을 9개 주로 나누었다.

 

*직: 중국 고대 순임금의 신하.

 

*이상의 대목은 [서전(書傳][익직(益稷]편 한부분을 인용하여 순임금 앞에서 신하들이 고적법을 실천하던 모습을 본보기로 제시한 것이다.

*기: 중국 도대 순임금의 신하.

 

*동방삭: 중국 전한(前漢) 무제(武帝)의 신하로 해학과 변설에 능함.

 

*우맹: 중국 춘추시대 초(楚)나라 사람으로 유명한 배우

 

*아전[서경(書經)]의 두 편면으로 [요전(堯電)]과 [순전(舜典)].

 

*이모[서경]의 두 편명으로 [대우모(大禹謨)]와 [고요모(皐陶謀)].

*순사고언: 사실을 물어서 상대편의 잘잘못을 고찰함.

 

*삼재고적: 3년마다 관리들의 공과를 조사함.

 

*육관: 중국 주나라 때의 여섯개의 행정기관으로 천관(千官) 지관(地官)춘관(春官) 하관(夏官) 추관(秋官) 동관(冬官)이다. 후대에는 이 제도가 육조(六曹:史 戶 福 兵 刑 工)로 바뀌었다.

 

 

*왕계: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 사람으로 위(魏)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범저를 데려다가 벼슬을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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