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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제1부,허례허식을 경계하라) -정약용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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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1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허례허식을 경계하라

​寄兩兒

1803년 정월 초하루

 


 

 

폐족도 성인이나 문장가가 될 수 있다.

새해가 밝았구나. 군자는 새해를 맞으면서 반드시 그 마음가짐이나 행동을 새롭게 해야 한다.

 

나는 소싯적 새해를 맞을 때마다 꼭 일년 동안 공부할 과정을 미리 계획해보았다.

 

예를 들면 무슨 책을 읽고 어떤 글을 뽑아 적어야겠다는 식으로 계획을 세워놓고 꼭 그렇게 실천하곤 했다.

 

때론 몇개월 못 가서 사고가 발생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아무튼 좋은 일을 행하고자 했던 생각이나 발전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지지 않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너희들 공부에 대해서 글과 편지로 수없이 권했는데도 너희는 아직 경전이나 예악에 관해 하나도 질문을 해오지 않고 역사책에 관한 논의도 보여주지 않고 있으니 어찌된 셈이냐?

 

너희들이 내 말을 이다지도 무시한단 말이냐? 도회지에서 자라난 너희들이 어린시절에 보고 배운 것이 문전의 잡객(雜客)이나 시중드는 하인, 아전 들뿐이어서 말씨나 마음씨가 약삭빠르고 비천해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못된 병이 골수에 박혀 너희 마음속에 착한 행실을 즐겨 하고 공부하려는 뜻이 전혀 없는 것이다.

 

내가 밤낮으로 애태우며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은 너희들 뼈가 점점 굳어지고 기운이 거칠어져 한두해 더 지나버리면 완전히 내 뜻을 저버리고 보잘것없는 생활로 빠져버리고 말 것만 같은 초조감 때문이다.

 

작년에는 그런 걱정에 병까지 얻었다. 지난 여름은 앓다가 세월이 허송했으며 10월 이후로는 더 말하지 않겠다.

 

 

 

 

그렇더라도 마음속에 약간의 성의만 있다면 아무리 난리 속이라도 반드시 진보할 수 있는 법이다. 너희들은 집에 책이 없느냐? 몸에 재주가 없느나? 눈이나 귀에 총명이 없느냐? 어째서 스스로 포기하려 하느냐?

 

영원히 폐족으로 지낼 작정이냐? 너희 처지가 비록 벼슬길은 막혔어도 성인(聖人)이 되는 일이야 꺼릴 것이 없지않느냐?

 

문장가가 되는 일이나 통식달리(通識達理)의 선비가 되는 일은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 꺼릴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과거공부하는 사람들이 빠지는 잘못을 벗어날 수도 있고, 가난하고 곤궁하여 고생하다보면 그 마음을 단련하고 지혜와 생각을 넓히게 되어 인정(人情)이나 사물의 진실과 거짓을 옳게 판단할 수 있는 장점까지 가지고 있다.

 

 

 

 

그런 까닭에 선배로서 율곡(栗谷)과 같은 분은 어버이를 일찍 여의고 그 어려움을 참고 견디어 얼마 안 있어 마침내 지극한 도(道)를 깨쳤고,

 

우리 집안의 선조 우담(愚潭)* 선생께서도 세상사람들의 배척을 받고서 더욱 높아졌으며,

 

성호(星湖)선생께서도 난리를 당한 집안에서 이름난 학자가 되었으니, 이분들 모두 당대의 고관대작 집안의 자제들이 미칠 수 없는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은 너희도 일찍부터 들어오지 않았느냐?

 

 

 

 

폐족에서 재주있는 걸출한 선비가 많이 나오는 것은, 하늘이 재주있는 사람을 폐족에서 태어나게 하여 그 집안에 보탬이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부귀영화를 얻으려는 마음이 근본정신을 가리지 않아 깨끗한 마음으로 독서하고 궁리하여 진면목과 바른 뼈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평민으로서 배우지 않으면 못난 사람이 되고 말지만 폐족으로서 배우지 않는다면 마침내는 도리에 어긋나 비천하고 더러운 신분으로 타락하게 된다.

 

아무도 가깝게 지내려 하지 않아 결국 세상의 버림을 받게 되고 혼인길마저 막혀 천한 집안과 결혼하게 되며, 물고기의 입술이나 강아지의 이마 몰골을 한 자식이 태어나면 그 집안은 영영 끝장나는 것이다.

 

 

 

내가 유배생활에서 풀려 몇년간이라도 너희들과 생활할 수만 있다면 너희들의 몸과 행실을 바로잡아 효제를 숭상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일에 습관이 들도록 할 것이다.

 

경사(經史)를 연구하고 시례(詩禮)를 담론하면서 3,4천권의 책을 서가에 진열하고 일년 정도 먹을 양식을 걱정하지 않도록 원포(園圃)에 상마(桑麻)소과(蔬果) 화훼 약초 들을 심어 잘 어울리게 하여 그것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구경하면서 즐거워할 것이다.

 

마루에 올라 방에 들면 거문고 하나 놓여 있고, 주안상이 차려져 있으며, 투호(投壺)하나, 붓과 벼루 책상 도서 들이 품위있고 깨끗하게 놓여 있어 흡족할 만할 때 마침 반가운 손님이 찾아와 닭 한마리에 생선회 안주삼아 탁주 한잔에 맛있는 풋나물을 즐겁게 먹으며 어울려 고금의 일을 논의하면서 흥겹게 산다면 비록 폐족이라 하더라도 안목있는 사람들이 부러워할 것이다.

 

이렇게 한두해 세월이 흐르다보면 반드시 중흥의 여망이 비치게 되지 않겠느냐? 이 점 깊이 생각해보도록 하여라. 이런 일조차 하지 않을 것이냐?

*우담: 숙종 때 학자 정시한(丁時翰,1625~1707)의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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