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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독서HAZA365>/책속글귀-2016년

책속글귀- 희망의 인문학 中 (by 주부독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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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 인문학
 
바로 이 정치와 동의어로 사용됐던 단어가 '자기 통제'였다.
투키디데스는 '통치의 온건한 형태"라는 뜻을 표현하는 데 '자기 통제'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아이스킬로스의 [탄원자들] 등장하는 고소인들이 보인 폭력적 행위는 '자기 통제'의 의미를 무색케 만드는 사례라고 하겠다.

인문학과 성찰적 사고, 그리고 정치라는 세 가지 개념을 하나로 통합한 말이 많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한 공적인 인간 세계의 기질이나 경향을 잘 나타낸 '자기 통제'라는 개념 속에는 인문학, 평온함, 그리고 인간의 삶에서 지워낼 수 없는 어려움들을 성찰을 통해 극복하는 것 등과 같은 뜻들이 담겨 있다. '자기 통제'는 무력에 맞설 수 있는 방어 수단이며, 진정한 '힘'에 대한 정의이고, 인간다움 그 자체다. -p198
 



 
가난의 대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일지라도 부자들과 비교해서 인문학을 공부할 능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데 가 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감성과 지성이다.
 
그런데 우파들 또한 나신들의 이익을 지켜내는 데에 있어서는 매우 탁월했다. 그들은 플라톤의 경고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의 관점에서 정확히 이해하고 있듯이, 빈민들이 인문학 학습이 빈민들에게 정치적 삶을 가르치며, 진정한 '힘'이 존재하고 있는 공적 세계로 그들을 거의 확실하게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성찰적으로 사고하거나 공적인 삶을 사는 것은 부자들보다 빈민들에게 더 많은 이점을 가져다준다.
게임의 승자가 될 때는 물론이고, 게임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내기만 해도 '힘'을 쟁취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빈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게임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데 그들의 환경이 자신들을 불리한 입장에 처넣는 무력의 방해만 없으면 게임에서 부자들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다.
 
미국 사회에서 인문학의 급진성은 부장와 빈민을 분명하게 가르는 근거인 '힘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표출된다.
일단 이러한 부정이 일어나면 빈민들의 정신 속에 자유가 가능해지고, 플라톤의 국가는 정치의 부모라 할 시인들의 맹습 앞에서 붕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역사의 진가를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들이라면 인문학에 내제된 급진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역사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정치라는 것이 완벽한 세계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보다 훨씬 더 문제가 많았던 사회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예제도를 인정했고, 여성의 권리를 부정했으며, 아동성애에 가까운 동성애를 인정했고, 지도자들의 음모와 부패를 건뎌냈다.
고대 그리스 사회의 비범함은 인간의 예술, 문학, 수사학, 철학 그리고 자유라고 하는 독특한 개념으로 자신의 인간됨을 인식함으로써 자신을 재창조했다는 데 있다.

바로 그 재창조의 순간에, 고립됐던 개인적 생활이 끝나고 정치가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왜 이제는 그런 재창조의 물결이 다시 일지 않고 있는 것일까?
왜 빈민들은 소외돼야만 하고, 무력에 포위당한 채 자신들의 삶을 잃게 되었는가?

로버트 메이나드 허친스와 비스니 워커는 미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동일한 처방을 내놓았는데, 급진적 인문학이 바로 그것이다.
허친스가 말한 것처럼 "최고의 학생들을 위한 최고의 교육은 모든 이들을 위한 최고의 교육이다."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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