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책소개,독서HAZA365>/책속글귀-2016년

책속글귀- 도덕경 中 (by 주부독서연구소)

728x90

 

 

 

제33장
자기를 아는 것이 밝음
-참 자아의 발견

남을 아는 것이 지혜 智라면,
자기를 아는 것은 밝음 明입니다.
남을 이김이 힘있음 有力이라면,
자기를 이김은 정말로 강함 强입니다.

족하기를 아는 것이 부함 富입니다.
강행하는 것이 뜻있음 有志입니다.
제자리를 잃지 않음이 영원 久입니다.
죽으나 멸망하지 않는 것이 수 壽를 누리는 것입니다.




자성 自省, 내성 內省, 극기 克己, 자족 自足, 견지역행 堅持力行, 등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을 아는 것이 '지 智"라고 했는데, 이때의 '지 智'는 '지락 智略'이나 '지모 智謀' 같은 말에서 보듯이 훌륭한 지혜가 아니고 '꾀'같은 것이다.

딴 사람을 아는 것은 일상 생활에서 성공하는 데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려는 심리학, 인류학, 역사학, 철학, 종교학 같은 학문을 통해 인간의 본성이나 문화적, 역사적 맥락 등을 아는 일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상대방이나 인간 전체의 외적, 객관적 사실만 아는 앎은 피상적인 '지 智'에 불과하므로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을 아는 것이다.
소크라테스(Socrates)의 말을 빌리면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아는 것이 '명 明"이라고 했는데 '명 明'은 사물의 깊은 이치를 깨닫는 깨우침으로서 '관 觀'보다 한단계 더 깊은 체험적 인식능력이다.

남을 이기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자기를 이기려면 '정말로 강함'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강함'이라고 했을 때 '강 强'이라는 글자를 썼는데, 이는 [도덕경]전체를 통해 볼 때(제30장, 제42장, 제55장, 제76장) 무력, 폭력을 뜻하는 말로서 배격해야 할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자기를 쳐 이김이 바로 그 '강 强'이라는 것이다.

'강 强'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뜻이다.
하나는 덮어놓고 힘을 쓰려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드러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내면적 강함이다.

예를 들어 남에게 한 대 얻어맞았을 때 당장 맞아죽는 일이 있더라도 일어나 대들고 싸우는 것을 보통 '용기' 있는 일이라 한다.
사실 이런 '용기'는 정말 비겁한 사람이 아닌 이상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강함이다.
그러나 화가 나더라도  참고(사실 엄격히 말하면, 도에 따라 사물을 보는 사람은 화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팔팔한 기백을 죽은 채, 차분한 태도로 상대방을 대함으로 상대방이 꼼짝 못하도록 하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강함이다.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싸움 닭을 훈련시켜서 가만히 있어도 다른 닭이 꼼짝 못하게 한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제68장 해설 참조)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632)는 히브리 성서의 말이 생각난다.

자족하기를 아는 것이 부함이라는 것은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자명한 일이다.
그리스도교 성사에서 바울도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립보서4:11~12)고 했다.

요즘 우리 대부분이 스스로 가난하다고 느끼는 것은 끼니를 걱정하는 절대 가난 때문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으로서 무엇이나 남처럼 가지려 하는 마음 때문에 생겨난다.
흔히 말하듯 '필요(need)'보다도 '욕심(greed)'에서 생기는 가난이다.
이럴 때 분수를 알고 자족할 줄을 알면 빈곤감이 없어지고 자기에게 있는 것만으로도 부자처럼 느끼며 살 수 있다. 앞에서 인용한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말대로 'D-cognition'에서 'B-ognition'으로 넘어감이다.

여기서 "강행함이 뜻있음"이라고 할 때 '강행'이 좋다는 것인지 나쁘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 말 앞뒤로 '족하기를 앎', '자기 자리를 잃지 않음', '죽어도 멸망하지 않음' 등 모두 좋은 뜻의 말이 있기 때문에 이것도 좋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순리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유가나 법가에서 주장하듯, 남보다 뛰어나려고 불철주야 노력해서 자기의 뜻 志을 편다는 뜻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도와 하나되기 위해 근면 역행 勤勉力行하고, 그러다 보면 도와 하나되겠다던 본래의 뜻이 이루어짐을 뜻한다고 푸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의 본래 자리는 도의 자리, 이 자리를 잃지 않고 지킴이 영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죽어도 명망하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장수라는 것이다.
여기서 '영원 久'이니 '장수 壽'니 하는 말은 몸은 죽지만 영혼은 살아남는다는 서양의 영혼 불멸론이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개체로서의 우리 몸이 영원히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중국 고래의 양생술이나 신선술의 입장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삶과 죽음의 상대적 이원성을 초월하여 도와 하나됨으로 도에 따라 생성 변화하고, 도에 따라 생성 변화함으로써 도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도의 것이로다."

출처: 도덕경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