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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독서HAZA365>/책소개,독서HAZA-2022년

에라스무스 평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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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에라스무스 평전

-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광기에 맞선 이성

 

에라스무스가 원하는 것은

평화, 평화, 평화뿐이다.

어느 편에도 들지 않고

비켜서 있겠다는 것, 평온뿐이다.

"나는 나의 평온을 원한다

 Consulo quieti meae.”

 

 

 

에라스무스 평전 책이 도착했다. 책표지가 고급스럽다. 하드 표지로 되어 있고 앞면에 에라스무스의 얼굴이 살짝 비친다.

뒤표지를 본다. 홀바인이 그려낸 불후의 명작 속 에라스무스의 모습이 드러난다. 박물관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멋진 그림이다.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에라스무스 평전? 왠지 어려울 것 같다. 언뜻 "지루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지루할 틈이 없다. 능숙한 단어 선택과 적절한 비유는 책 속으로 끌어당긴다.

에라스무스 평전을 읽을수록 에라스무스에 대해 더 궁금해진다. 궁금해지게 만든다. 에라스무스의 글을 접해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저자의 유려한 글솜씨 덕분이다.

이는 에라스무스보다 더 에라스무스적인 스토리를 이어가기 때문이다. 거창하거나 굵직한 사건 때문이라기 보다 에라스무스의 일생을 드라마틱 하게 표현한 때문이라 생각한다.

육체는 연학하지만 보이지 않는 섬세한 내면의 힘, 즉 강인한 영혼의 힘을 가진 에라스무스를 잘 그려냈다. 이는 작가 츠바이크 자신의 자화상이자 정신적 상흔의 기록이기도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평화와 학문의 정신을 일깨운 에라스무스,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이는 바로 에라스무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삶의 흔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에라스무스는 어떤 생각과 신념으로 살아갈까? 이야기는 그의 사명과 삶의 의미에서부터 시작한다. 에라스무스는 대립하는 것들을 인간애의 정신 속에서 조화롭게 통합하려 한다. 그는 문학과 철학, 책과 예술 작품, 여러 언어와 민족을 사랑했다.

그가 증오한 단 한 가지는 바로 광신이었다. 에라스무스는 '난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라는 자신의 좌우명을 마지막까지 사실로 만들었다. 에라스무스는 어느 것에도, 그리고 누구에게도 구속되려 하지 않았다.

 

에라스무스의 청년 시절을 보면 고집스러울 정도로 단호한 자유를 향한 의지, 그 누구의 하인도 되지 않으려는 의지는 에라스무스를 평생 유목민처럼 살게 했다.

그는 끊임없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다. 네덜란드에 있다가 곧 영국에, 그러다간 곧 이탈리아에, 독일에, 스위스에 나타난다. 에라스무스는 아주 가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부유하지도 않게 지낸다.

그의 철학적 성향에는 방황과 방랑이 집과 고향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다. 권력의 그늘 아래에서도 모든 책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조용한 방에서 좋은 책을 읽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의 글을 쓰는 것, 어느 누구의 지배자도 하인도 되지 않는 것, 이것이 에라스무스의 인생 목표였다. ​에라스무스의 진정한 실체는 분별력이다.

 

 

초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에라스무스의 용모는 결코 멋있다고 할 수 없다. 현실에 저항하지 않고 단지 뇌의 활동 속에서만 진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에라스무스의 얼굴은 이러한 정신의 미묘한 분위기를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 에라스무스의 한 폭의 초상화에서 작고 허약한 육체 뒤에 숨겨진 강한 영혼의 힘을 엿볼 수 있다.

 

에라스무스의 대가의 시절을 본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에라스무스의 수많은 대작 중 살아남은 것은 단지 즐거운 기분에서 우연히 얻은 아이, 반짝거리는 정신 유희, [우신예찬]뿐이다.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에 존재하는 본질에 대한 영혼적 결산이었기 때문에 가장 애착을 갖는다.

에라스무스식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사고한다는 뜻이며, 에라스무스식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이해하고 타협한다는 것을 뜻한다. 에라스무스식으로 사는 사람, 인류를 믿는 사람이 자신의 생활에서 장려할 것은 분리가 아니라 결합이다.

 

 

 

 

아는 것이 많은 지혜로운 인문주의자는 다양성 때문에 세상을 사랑한다. 편협성에 몸을 맡기는 대신 결속과 화합을 통해 인간을 더 사랑하고, 더 인간적이 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정신이고, 세계의 목표이며 미래라는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지금까지 혼자였다. 유럽의 주인이었고 새로운 복음 교리의 대가였다. 이때 대단한 경쟁자가 나타난다. 이 상대는 마르틴 루터이다. 두 사람은 성격적으로, 육체적으로 완벽한 대비를 이룬다.

육체에서부터 대비된다. 루터는 광부의 아들이며 농부의 후손이었으며 건강했다. 너무나도 건강했다. 두 사람의 정신성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상 세계에서 발원한다.

에라스무스가 말하면 정신적인 사람들에게 섬세하고 영적인 매력을 주던 것이, 루터가 말하면 그의 열정적인 방법 덕분에 즉시 구호와 함성이 되고 형태를 갖춘 요구가 된다.

에라스무스는 분명하고 객관적으로 명확하게 말할 때 가장 강한 반면, 루터는 격앙과 증오가 입술에서 격하게 튀어나올 때 가장 강하다.

에라스무스와 루터처럼 성격적으로, 육체적으로 완벽한 대비를 이루는 두 사람은 극히 드물다. 싸움의 승리는 애초에 루터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더 강력한 정신의 소유자라는 단순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가 더 싸움에 익숙하고 싸움을 즐기는 싸움꾼이었기 때문이다.

 

 

 

글로 논쟁을 벌이는 것은 어느 특정한 시대의 특징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특징이다. 위대한 논쟁이라 할 수 있다. 에라스무스는 싸울 때조차 상대방의 의견을 상당 부분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에라스무스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모든 고독의 영원한 찬구, 가장 성실한 친구이자 최고의 위로자, 글쓰기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병자의 곁을 떠나지 않은 것이다.

 

 

에라스무스의 유산으로 책은 맺음을 한다. 분열된 민족들에게 화합을 말하고, 앞으로 다가올 더 지고한 시대사상인 인류애를 전 인류의 가슴에 심어 주는 그런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에라스무스의 유산 속에는 위대한 약속이 창조적인 힘으로 살아 있다. 자기만의 삶의 공간을 넘어 모든 인류에게 정신을 불어넣어 주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만이 각각의 개인들에게 자기의 힘을 넘어서는 힘을 선사해 줄 수 있다.

우리 인간은 개인의 욕심을 초월한,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요청에서 자기의 진정한 기준, 성스러운 기준을 느낀다.


 

에라스무스 평전을 읽으며 인상적인 것은 그는 중립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에라스무스의 정신은 세속의 유혹을 뿌리치고 광신과 폭력에 맞서 화합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힘썼다.

에라스무스의 내면의 힘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다져졌다. 허약한 육체와 달리 강인한 영혼의 힘으로 칠십 년이라는 세월을 살아낸 것이다. 에라스무스의 아쉬운 점은 결단의 힘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평전을 써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는 마치 에라스무스처럼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잔잔하게 흔들리지 않는 글 솜씨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지루하지 않고 치밀하게 구성하여 글을 끌고 가는 힘이 있다. 읽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처음 생각을 깨고 끝까지 흥미롭게 읽었다.

 

에라스무스 평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더박스 출판사에서 보내주신 책으로 쓴 리뷰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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