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평전>
1909년 10월 26일
1909년 10월 26일 이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안중근은 [안응칠역사]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당시의 감정이나 생각까지 제시하고 있으므로, 이를 먼저 제시한다.
이튿날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
깔끔한 새 옷은 모두 벗고 양복으로 갈아입은 뒤에 권총을 지니고 바로 정거장으로 갔다.
그때가 오전7시쯤이었다.
그곳에 이르러 보니 러시아의 장관과 많은 군인들이 이토를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찻지에 앉아서 차를 두세 잔 마시면서 기다렸다.
9시쯤 되니 이토가 탑승한 특별열차가 도착했다.
그때 그것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나는 찻집 안에 앉아서 동정을 엿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느 시점에 저격하면 좋을까?'
거듭 헤아려보아도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토가 기차에서 내렸다.
군대의 경례와 군악 소리가 하늘을 가르고 내귀에 흘러들었다.
그 순간 분기(忿氣)가 갑자기 일어나고 3천 길 업화(業火)가 뇌리에서 치솟았다.
'무슨 까닭에 세태는 이처럼 불공평한가!
아아, 이웃 나라를 강제로 뺏고 사람의 목숨을 잔혹하게 해치는 자는 이처럼 기뻐 날뛰면서도 거리낌이 없는데, 죄 없고 어질고 약한 인종은 도리어 이처럼 곤경에 빠지는 것인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바로 큰 걸음으로 용감하게 나아갔다.
군대가 줄지어 있는 뒤편에 이르러서 바라보니, 러시아의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데 그 앞쪽에 얼굴은 누렇고 수염은 흰 조그마한 늙은이 하나가 있었다.
어찌 이처럼 몰염치하게 감히 하늘과 땅 사이를 마음대로 다니는가.
생각건대 이는 이토 늙은 도적이 분명했다.
곧 권총을 뽑아들고 그 오른쪽을 향하여 통쾌하게 4발을 쏘았다.
그런 다음 생각해보니 매우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본래 이토의 얼굴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한 번 잘못 쏜다면 큰일(大事)에 낭패를 볼 것이었다.
결국 다시 뒤쪽에 무리 지어 있는 일본인 가운데 가장 위엄 있게 앞장서서 가는 자를 목표로 삼았다.
3발을 연달아 쏜 뒤에 다시 생각하니, 만일 잘못하여 죄 없는 사람을 다치게 한다면 분명히 일이 불미(不美)할 듯했다.
그래서 잠시 멈추고 생각할 즈음에 러시아 헌병이 와서 나를 붙잡았다.
그때가 곧 1909년 음역 9월13일 오전 9시 반 쯤이었다.
그때 나는 바로 하늘을 향하여 큰소리로 '대한만세'를 세 번 외쳤고,
그 뒤에 정거장의 헌병 분파소로 잡혀 들어갔다.
온몸을 검사한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 검찰관이 한국인 통역과 함께 왔다.
성명이며 어느 나라 어느 곳에 살고 어디에서 왔으며 무슨 까닭으로 이토를 해쳤는가를 물었으므로,
대강 설명해주었다.
통역하는 한국인이 한국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사진을 촬영한 일이 두서너 번 있었다.
오후 8-9시쯤에 러시아 헌병 장교가 나와 함께 마차를 타고 어느 방향인지 모를 곳으로 가더니,
일본 형사관에 이르러 나를 넘겨주고 가버렸다.
나날이 점차 가까워지면서 전옥(典獄), 경수계장(守係長)과 그 아래의 일반 관리들이 특별히 후대하니,
나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끔은 마음속으로 의아스럽게 여기기도 하였다.
이것이 현실인가, 아니면 꿈인가? 같은 일본인인데 어찌 이처럼 크게 다른가?
한국에 와 있는 일본인은 어찌 그리도 억세고 모질며, 뤼순에 와 있는 일본인은 무슨 까닭에 이처럼 인후(仁厚)한 것인가? 한국과 뤼순에 종류가 다른 일본인이 권력자인 이토의 극악한 마음을 본받아서 그렇게 된 것인가? 뤼순의 일본인이 권력자인 도독(都督)의 인자한 덕을 따라서 그렇게 된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없었다.
마지막 순간,
동양의 평화를 호소하다.
오전 10시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전옥 및 소관등이 형장 검사실에 착석하였다.
동시에 안중근을 끌어내어 사형 집행의 뜻을 고지하고 유언의 유무를 질문하였다.
안중근은 다른 유언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원래 자기의 흥행이야말로 오로지 동양의 평화를 도모하려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므로, 바라건대 오늘 임검한 일본 관헌 여러분도 다행히 나의 작은 충심을 잘 살피고 피아 구별이 없이 마음과 힘을 합하여 동양의 평화를 기도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라고 진술하였다.
또 이 기회에 임하여 동양평화의 만세를 삼창하고자 하니 특별히 허락하기를 바란다고 신청하였으나, 전옥은 그런 일은 할 수 없다고 설명하였다.
곧 간수로 하여금 백지와 백포로 그 눈을 가리게 하고, 특별히 기도하기를 허가해주었으므로 안중근은 약 2분간 묵도를 행하였다.
이윽고 두 사람의 간수가 부축하여 계단으로 교수대에 올라가 조용히 형의 집행을 받았다.
때는 10시 4분이었으며 10시 15분에 감옥의監獄醫가 그 모습을 검사하고 절명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드디어 집행을 끝내고 일동이 퇴장하였다.
10시 20분 안중근의 사체는 특별히 감옥에서 만든 침관에 넣고 흰 천을 덮어 교회당으로 운구하였다.
이윽고 그의 공범자인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의 세 사람을 끌어내어 특별히 예배를 하게 하고, 오후 1시 감옥의 묘지에 매장하였다.
이날 안중근의 복장은 지난밤 고향에서 온 명주로 만든 조선옷이었다.
저고리는 백색이었고, 바지는 흑색이었다.
품에는 성화聖畫 넣고 있었다.
그 태도는 매우 침착하여 얼굴빛과 말에 이르기까지 보통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고, 조용하고도 침착하게 죽음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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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때 감옥 밖에서는 안중근의 두 동생이 형의 시신을 인수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소노키가 기록한 것을 정리해보면 안정근과 안공근이 겪은 일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일본 특에서 이 소식을 듣고서는 두 사람의 외출을 금지시키고 '감옥법73조'와 '정부의 명령'에 따라 시신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대신 예배만을 허가 했다.
안정근 등은 법조문 적용의 잘못을 지적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들은 "나랏일에 순사한 형에 대해 사형의 극형을 내리기까지 하고 거기다가 시신도 교부하지 않으려는 너희의 참혹한 행동은 죽어도 잊지 않겠다"거나 "언젠가 반드시 갚을 때가 있을 것이다."라고 소리치며 저행했지만, 끝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결국 안정근과 안공근은 형사들에게 끌려 나가서 다렌행 기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시신을 인도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예배를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소노키는 안중근의 시신을 "오후 1시 감옥의 묘지에 매장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 장소가 정확히 어느 곳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적어도 아직은 그에 대한 믿을 만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
동생들에게 시신을 내어주지 않을 때부터 그에 대한 정보를 감추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한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안중근의 시신이 특별한 상징성을 갖게 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70번째 광복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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