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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목민심서[11부] 진황(賑荒)6조-​4. 시행방법[設施] ​​​::목민심서[11부] 진황(賑荒)6조 ​ 4. 시행방법[設施] 설시 ​ 진청(賑聽)을 설치하고 감리(監吏)를 두며, 가마솥과 소금.간장.미역.마른 새우 들을 갖추어놓는다. ​ 천하의 모든 일의 성패는 사람을 얻는데 있으니 적임자를 얻지 못하면 그 일을 잘 해나갈 수 없다. 반드시 청렴 하고 신중 하며 일을 잘 아는 이를 골라 도감 1인, 감관(監官)2인, 아전2인을 그자리 두어야 한다. 촌감(村監)은 사람을 더욱 잘 골라야 한다. 늘 보면 촌감은 뇌물을 받고 항아리에 곡식이 저장되어 있는 자에게 식구를 몇명 더 붙여 쌀을 나눠 주고, 의지할 데 없는 홀아비와 과부는 누락시켜 죽어가는 것을 서서 보기만 하고, 아전들과 어울려서 갖은 방법으로 농간질 한다. 이런 사람에게 진휼할 대상을 가려내는 권한을 .. 더보기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목민심서[11부] 진황(賑荒)6조 ​ 3. 세부계획[規模] 규모 다른 고을에서 떠돌아 들어오는 자도 받아들이고, 이 고을에서 떠돌아 나가는 자도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땅 네 땅의 경계를 두지 않는다. ​​이지함(李之菡)이 ​현령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유민들이 떨어진 옷을 입고 걸식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큰 집을 지어 수용하고 수공업(手工業) 기술 가르쳐주되 일일이 직접 맞대어 타이르고 친절히 깨우쳐 각기 의식(衣食)을 해결하게 했다. 그 중 가장 못하는 자에게는 볏짚을 주어 짚신을 삼게 하고 독려하니 하루에 능히 짚신 10켤레를 삼았다. 이를 파니 하루에 한 일로 누구나 한 말 정도의 쌀을 마련하고 그 나머지로 옷까지 마련할 수 있었다. 무능한 그들도 몇달.. 더보기
​​​::목민심서[11부] 진황(賑荒)6조-​ 3. 세부계획[規模] 규모 ::목민심서[11부] 진황(賑荒)6조 3. 세부계획[規模] ​ 진휼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있으니 첫째는 시기를 맞추는 것이요, 둘째는 규모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불탄 사람과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데 어찌 시기를 늦출 수 있겠으며, 많은 사람들을 다루고 물자를 고루 나눠주는데 어찌 규모가 없을 수 있겠는가? ​ 수재(水災)는 비록 혹심한 것이라도 그 화는 물에 잠긴 지역에 그치고, 바람. 서리. 병충. 우박 등 또한 반드시 온 천하의 재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큰 가뭄이 들어 산이 탈 지경이면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굶주려서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게 된다. 마땅히 입추(立秋)날부터 재빨리 대책을 세워 시각을 다투어 기회를 포착하고, 유리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날 쌘 새와 사나운 짐승이 출발 하듯 해.. 더보기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목민심서[11부] 진황(賑荒)6조 ​1. 구휼물자 준비[備資] ​ 한해 농사의 작황이 판명되면 빨리 감영에 가서 다른 고을의 곡식을 옮겨오는 것과 조세를 줄이는 것을 의논해야 한다. ​ ​ 영조38년에 삼남에 큰 기근이 들자 교서를 내렸다. "호서 안집사(安集使)의 보고서를 보니 굶주리는 백성들은 내 눈으로 보는 것 같구나. 강화의 쌀 2천 석과 함경도 교제창(交濟倉) 곡식 3만 석을 특별히 지급하도록 하럭하니 각 도의 감사들은 운송방법을 검토해서 신음하고 있는 백성들을 구제하도록 하고, 마찬가지로 교제창 곡식을 호남에 4만석, 영남에 3만 석 지급하도록 허가한다." ​ 또 교서를 내렸다. "지금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듯 호남을 도와야 하니, 남북의 교.. 더보기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목민심서[11부] 진황(賑荒)6조 구황(救荒)의 정사에는 예비만한 것이 없으니, 예비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구차할 따름이다. ​ ​ [문헌고비(文獻備考)에 이런 내용이 있다. "영조 12년에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었다. '작년 농사가 꽤 잘되었는데 금년 역시 풍년이 들 듯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우연히 송나라 신하 사마광(司馬光)의 문집을 보았더니, 흉년이 든 후에 진휼곡을 수집하려면 어려우니 반드시 풍년의 각 고을로 하여금 진휼곡을 미리 수집하도록 하되 그 많고 적음을 보아 진휼할 때처럼 등급을 나누어 상벌을 내리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좋습니다. 지금 풍작이 든 때를 이용하여 각 도와 각 읍으로 하여금 진휼곡을 모으.. 더보기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목민심서[11부] 진황(賑荒)6조- 1. 구휼물자 준비[備資]비자 황정(黃政)은 선왕(先王)이 마음을 쏟았던 바이니, 목민하는 재능은 이것에서 볼 수 있다. 황정이 잘되야 목민관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끝나는 것이다. ​ [문헌비고(文獻備考)]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선조 26년 (1593) 서울에 큰 기근이 들었는데 임금이 의주 피난길에서 돌아와 교시를 내렸다. "음식 담당자가 하루에 백미를 여섯 되 올리는데, 나는 본래 하루 세끼를 다 먹지는 않으니 세 되의 쌀인들 어찌 다 먹겠는가. 이제부터 세 되를 덜어 서울에 설치된 다섯 곳의 진장(賑場)에 나누어 보내도록 하라." 영조 9년(1733)에 이런 교서가 내려졌다. "오늘 거듭된 기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나의 부덕한 소치가 아.. 더보기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목민심서[10부]공전(工典)6조 ​ 6. 공작[匠作] ​ 벽돌 굽는 법을 강구하고 기와도 구워서 모두 기와집으로 하는 것도 선정(善政)이다. ​ 당나라의 위단(韋丹)이 홍주자사(洪州刺史)로 있을 때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기와집 짓는 법을 가르쳤다. 질그릇 굽는 자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기와 굽는 것을 가르치게 하고,구운 기와를 한 장소에 모아놓고 비용을 헤아려 팔게 하되 이익을 남기지 않게 하고, 그들의 세금을 반으로 줄여주었다. 그리고 도망가서 돌아오지 않는 백성은 관에서 도와주어 짓게하고, 가난하여 할 수 없는 백성에게는 물자를 주는 한편 먹을 것과 마실것을 싣고 직접 가서 권장하였다. 그렇게 하여 지은 기와집이 3천 700채이고, 이층집으로 만든 것이 4천 .. 더보기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목민심서[10부]공전(工典)6조 ​ 6. 공작[匠作] ​ 전거(田車)를 만들어 농사를 권장하고 병선(兵船)을 만들어 전쟁에 대비하는 것은 수령의 직무이다. ​ 전거는 간단해 만들기가 매우 쉬운데, 다만 백성들이 아직 이를 본 일이 없다. 전거로 풀과 똥과 곡식을 나르면, 전거 한 대에 싣는 양이 소 네 마리에 싣는 양과 비슷하니, 어찌 힘을 더는 것이 아니겠는가? 수레를 만들기 어려운 것은 바퀴살과 바퀴통 때문이다. 횡판(橫板)하나와 나뭇가지 둘을 세워 스물입자[廾]모양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축을 꿰고 둘레를 보완하여 바퀴를 만들면, 돈은 반전(半錢)도 쓰지 않고서 수레 한 대를 만들 수 있다. 여기에 끌채를 대고 자체를 붙여 전거를 만들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더보기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목민심서[10부]공전(工典)6조 ​ 5. 도로(道路) ​​여점(旅店)에서 간사한 자를 숨기지 않고 원(院)에서 음탕한 짓이 자행되지 않으면 백성은 마음을 맑게 할 수 있다. [다산필담]에서 말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민간에서 살아서 백성들의 실정과 거짓을 조금은 알고 있다. 무릇 도둑이 숨은 곳은 모두 여점이다. 진실로 정결한 마을에서는 발붙이기 어렵다. 낯선 얼굴이 한번 나타나면 서로 말하며 손가락질하기 때문에 아침에 숨어도 저녁이면 드러나 발붙이지 못한다. 오직 여점만은 사방의 사람들이 아무도 오래 머물지 않기 때문에 몸을 숨기기에 편리하다. 여점마다 간사한 자를 숨겨두어 천리가 고리로 이어져 있는 게 도둑떼의관행이다. 한 군데서 도둑이 잡히면 도둑과 소.. 더보기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정선(精選) 목민심서 -정약용 저 ​​​​ ​목민심서[10부]공전(工典)6조 ​ 5. 도로(道路) ​ 교량은 사람을 건너게 하는 시설이니, 날씨가 추워지면 마땅히 즉시 설치해야 한다. ​ ​ 자산(子産)이 정나라의 정치를 담당했을 때, 자기의 수레로 사람들을 진수(溱水)와 유수(洧水)를 건너게 하였는데, 맹자는 "은혜로우나 정치를 알지못하도다. 11월에 걸어 다니는 다리가 이루어지고 12월에 수레가 다닐 수 있는 다리가 이루어지면 백성들이 건너기를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김서구(金敍九)가 해남현감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고을에는 큰 냇물이 있어 해마다 백성들에게 수해의 걱정이 있었다. 그가 백성을 위하여 돌을 쌓아 제방을 만들고 돌다리를 만들었는데 다리 밑부분은 무지개 모양으로 하였다.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