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의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는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로 다가오기도 한다.
죽으면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숨을 쉬고 움직이며 생각하고 느끼던 존재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공포나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흔치 않다.
하이데거의 지적처럼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로서 인간은 염려(Sorge)와 불안(Angst)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죽음이 아무리 두렵다고 해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의 죽음을 대신하게 할 수는 없다. 설령 그럴 수 있다 할지라도 그 희생은 나의 죽음을 잡시 유보하는 것일 뿐 영원히 미루는 것은 아니다.
또 유예된 죽음의 당사자 역시 살아났다는 안도감보다는 오히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자신의 죽음을 보며 "나도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톨스토이(Lev N. Tolstoy)의 소설<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이반 일리치의 장례식을 찾은 그의 친구 표트르는 죽은 이반 일리치를 통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이 두렵긴 하지만 아직은 자신에게 도래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하는 그의 모습은 인간이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을 사실적을 묘사하고 있다.
세상에, 사흘 밤낮을 끔찍힌 고통에 시달리고 나서야 겨우 숨을 거두다니! 사실 언제든,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나한테 똑같이 닥칠 수 있는 일이잖아. 이런 생각이 들자 순간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어찌 된 조화인지 거의 동시에 "이건 이반 일리치에게 일어난 일이지 나한테 일어난 일이 아니아.'라는 지극히 평범한 생각이 그를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표트르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실 타인의 죽음은 곧 '살아있음'에 대한 안도로 바뀌기도 한다.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의 이러한 심리를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고 있다.
사실 우리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우리가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려고 할 때마다 실제로는 여전히 관찰자로서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심리 분석학에서는 과감하게도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
혹은 달리 말하면, 우리 모두는 무의식 속에서 자신의 불멸을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주장과 달리 불멸에 대한 확신이 죽음의 두려움을 완전히 제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의식의 차원에서 죽음에 대한 불안감과 죽지 않았음에 대한 안도감이 공존하는 것처럼 무의식의 차원에서도 불멸에 대한 확신과 함께 죽음에 대한 상상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프로이트가 후기에 '죽음에 대한 상상'. 즉 죽음 충동(Todenslieb)에 주목하며 인간 정신의 깊숙한 곳에 내재하는 파괴적 성향을 드러내고, 삶을 "쾌락"이 아닌 "죽음 충동과의 투쟁"으로 정의한 것도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출처: 13가지 죽음 -이준일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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