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제23장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
-언어를 넘어서는 경지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입니다.
회오리바람도 아침 내내 볼 수 없고,
소낙비도 하루 종일 내릴 수 없습니다.
누가 하는 일입니까?
하늘과 땅이 하는 일입니다.
하늘과 땅도 이처럼 이런 일을 오래 할 수 없거늘
하물며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도를 따르는 사람은 도와 하나가 되고,
덕을 따르는 사람은 덕과 하나가 되고,
잃음을 따르는 사람은 잃음과 하나가 됩니다.
도와 하나된 사람[도] 역시 그를 얻었음을 기뻐하고,
덕과 하나된 사람[덕] 역시 그를 얻었음을 기뻐하고,
잃음과 하나된 사람[잃음] 역시 그를 얻었음을 기뻐할 것입니다.
신의가 모자라면
불신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출처: 도덕경 -老子 원전. 오강남 풀이
큰소리로 말을 많이 하여 자기를 과시하려 하거나 길게 논리를 늘어놓아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것이 우리 일반 사람의 성향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순리라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합하여 온갖 일을 이루어 내지만 요란스럽게 떠들면서 하지 않는다.
별이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게 하고,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열매가 맺게 하는 등 대자연의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런 것을 말로 하는 것도 아니고, 여러 말로 선전하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공자님도 [논어]에 비슷한 말을 했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는가? 사철이 순리대로 바뀌고 만물이 생겨나지만, 하늘이 무슨 말을 하는가?" (17:19)라고 했다.
[도뎍경]에 의하면 하늘과 땅도 가끔씩 말을 하기도 한다.
회오리바람이나 소낙비가 하늘과 땅의 말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하늘과 땅의 말도 아침 나절이나 하루 이상 계속되는 경우는 드물다. 하늘과 땅도 이렇게 가끔씩 짧게 말할 뿐인데, 어찌 사람이 그토록 오래 말을 계속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그보다 훨씬 말을 적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는 이야기다.
"도를 따르는 사람은 도와 하나가 되고" 하는 구절은 그런대로 이해가 되는데 "덕을 따르는 사람은 덕과 하나가 되고, 잃음을 따르는 사람은 잃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덕 있는 사람을 만나면 덕이라는 점에서 그와 동조하고, 덕에 결함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를 경멸하여 멀리하지 말고 다른 공통점을 찾아 그와 하나가 되라는 말로 푸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덕德은 '득得'과 상통하는 글자이다. (중국어로는 두 글자의 발음이 같다.)
따라서 여기서는 '얻음得'을 대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느 주석에 의하면 '얻음'은 도와 하나된 상태를 말하고 '잃음'은 도에서 떨어진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도와 하나가 되면 우리에게 있던 본래적인 것을 다시 얻게 되는 것이고, 도에서 떨어지면 그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失'은 '실낙원失樂'의 상태, 곧 벌거벗은 것도 의식하지 못하며 천진스럽게 살던 주객 미분의 의식 상태를 '잃어버리고'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이분법적 의식(dualistic consciousness)'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이라 보 수 있다.
'득得'은 이런 일상적 이분법적 의식을 초월함으로 '얻어진' '비이분법적 의식' 내지 '초이분법적 의식'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은 어느 의미에서 '복낙원復樂園'이기는 하지만 처음 낙원으로 그대로 돌아감을 뜻하지는 않는다.
처음 낙원에서는 주객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의 '꿈꾸는 듯한 천진성(dreaming innocence)'에서 살았지만 이런 상태를 잃고 지금처럼 주객 분리의 상태에 살다가 이런 상태의 한계성을 자각하고 이 상태를 벗어났을 때는 처음 상태와 두 번째 상태가 변증법적 종합을 이룬 제3의 더욱 고차원적 의식 상태로 승화하기 때문이다.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결국 제2단계의 의식을 활용하면서 산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어느 의미에서 필요한 단계이기는 하지만 최상의 상태가 될 수 없는 것으로 인간은 언제까지나 이런 상태속에서만 계속 살아갈 수가 없다.
말장난으로서의 정치, 말장난으로서의 변론, 말장난으로서의 학문 등은 물론 타기해야 할 일이지만, 심지어 우리가 살아 가는 데 불가결한 합리적인 사고와 조리 정연한 말이라도 그것이 전부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말로 할 수 없는 경지가 있다는 것, 이성적 추구만으로는 뚫을 수 없는 경지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런 경지를 궁극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것은 도와 하나되는 경지다. 이것이 바로 '신비스런 하나됨 玄同'으로서 이런 경지가 되면 도마저 이를 기뻐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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