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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도덕경>- 제14장,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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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제14장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
-도의 신비적 초월성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 이름하여 이夷라 하여 봅니다.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 이름하여 희希라 하여 봅니다.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 이름하여 미微​라 하여 봅니다.
이 세 가지로도 밝혀 낼 수 없는 것,
​세 가지가 하나로 혼연 일체를 이룬 상태.


그 위라서 더 밝은 것도 아니고,​
그 아래라서 더 어두운 것도 아닙니다.
끝없이 이어지니 무어라 이름 붙일 수도 없습니다.

결국 '없음'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이를 일러 '모양 없는 모양 無狀之狀',
'아무것도 없음의 형상 無物支象'이라 합니다.
가히 '황홀'이라 하겠습니다.


앞에서 맞아도 그 머리를 볼 수 없고,
뒤에서 좇아도 그 뒤를 볼 수 없습니다.
태고의 도를 가지고 오늘의 일有을 처리하십시오.
태고의 시원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도의 실마리'라 합니다.


출처: 도덕경       -老子 원전. 오강남 풀이


 
​이 장은 제1장 및 제25장과 함께 도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장으로 유명하다.
도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다고 한다.
이런 면을 두고 각각 '아리송함夷', '아득함希', '여림微​'이라 불러 본다는 것이다.
 
이 세 글자의 중국 발음은 각각 'Yi", 'hsi', 'wei'. 초기 선교사 중에는 이것이 유대/기독교에서 쓰는 신의 이름 'Yahweh(여호와, 야훼)'와 관계있는 것 아닌가 하여 감격한(?) 일도 있었다.


아무튼 도의 근본적인 차원은 일상적인 감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양도, 소리도, 형체도 없는 것.

그러나 이 가운데 어느 것도 도의 본질을 완전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세 특성을 한꺼번에 다 포함한 것 또는 그 이상이다.
도는 결국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는 뜻이다.


노자님과 기타 도가들뿐 아니라 세계 많은 종교에서는 궁극 실재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이 '무엇이다' 하는 긍정적인 표현보다는 '무엇일 수 없다'는 부정적인 표현을 더 많이 쓴다.

가장 뚜렷한 예가 힌두교에서 궁극 실재인 브라흐만(Brahman)을 두고 이야기할 때 쓰는 '이것일 수도 저것일 수도 없다(neti-neti)는 표현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Tomas Aquinas)도 "신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우리가 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뿐"이라고 했다.

이렇게 궁극 실재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부정​의 길(vianegativa)'이라 한다.
이 짧은 장에서 '아닐 불 不'자가 아홉 번, '없을 무無'자가 세 번 쓰이고 있다.
그야말로 '말할 수 없음에 대해서만 말할 뿐' 이라는 식이다.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은 무한하다는 뜻이다.
무한하다는 것은 무엇으로 쪼개거나 무슨 범주에 집어넣을 수 없다는 ​뜻이다.
크다고만 할 수도 없고 작다고만 할 수도 없다.


사실 절대적 궁극 실재로서의 도는 세상의 제일 큰 것보다 더 크고, 동시에 제일 작은 것보다 더 작다. 이처럼 가장 큼과 가장 작음을 동시에 품고 있는 무엇, 무한히 크기도 하고 무한히 작기도 한 무엇을 어찌 보통의 말로 표현 할 수 있으며 보통의 생각으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궁극실재는 보통의 논리로 따지면 모순이요, 역설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도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넘어서는 초합리적이고 초이성적인 것으로서 독일 종교학의 거성 루돌프 오토(Rudolf Otto)가 말한 '엄청난 신비(mystereum tremendum)'라는 것보다도 더 엄청나고 신비스러운 무엇이다.


도의 근본 자리는 결국 없음 無의 세계이다.
그러나 도는 그 자체 형상이 없고 모양도 없지만 모든 형상, 모든 모양을 가능하게 하는 형상 자체, 모양자체이다. 이렇게 말로만 엮어 나가도 어질어질하고 아물아물한데 도 그 자체는 오죽하겠는가? 그야말로 앞도 뒤도 모르는 두루뭉수리 같은 존재 아닌 존재로서,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는 무엇이다. '없이 있음'이랄까 '있이 없음'이랄까.


그러나 이렇게 아리송하고 신비스런 도이지만 그 도를 가지고 그 원리에 입각해서 현상 세계의 사물을 대하라고 한다. 그러면 태고의 시원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 유 有의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을 통해 그것들의 근원되는 비존재, 무無의 세계를 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도의 본질로 들어가는 '실마리'가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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