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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도덕경>- 제12장, 다섯 가지 색깔로 사람의 눈이 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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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제12장
다섯 가지 색깔로 사람의 눈이 멀고​
-감각적 욕망의 극복

 


 
​다섯 가지 색깔로 사람의 눈이 멀게 되고,
다섯 가지 소리로 사람의 귀가 멀게 되고,
다섯 가지 맛으로 사람의 입맛이 고약해집니다.

말달리기, 사냥하기로 사람의 마음이 광분하고,
얻기 어려운 재물로 사람의 행동이 밋나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배腹를 위하고 눈을 위하지 않습니다.
후자는 뒤로하고 전자를 취합니다.


출처: 도덕경       -老子 원전. 오강남 풀이



동양에서는 예부터 '오행 五行'의 원리에 따라 '오복'이니 '오륜'이니 '오관'이니 하는 것처럼 많은 것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 습관이 있었다. 따라서 여기서도 '오색'은 꼭 청, 황, 적, 백, 흑의 다섯가지 색깔만을 뜻한다기보다는 '여러 가지 색깔', '모든 색깔' 이라는 뜻이다. 오음(궁, 상, 각, 치 우)도 오미(신맛, 짠맛, 단맛, 매운맛, 쓴맛)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음률, 여러 가지 맛을 말한다.


아무튼 색깔, 소리, 맛, 스포츠, 재물 등 감각적이요 외면적인 가치 때문에 내면적인 세계를 하찮게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이야기다. 제3장의 이야기를 중복 내지 부연하고 있다.


그럼 감각적이고 외면적인 것은 모두 외면해야 한다는 뜻인가?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을 보더라도 그것으로 우리의 눈이 멀게 될까봐 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아름다운 노래가 들려 와도 거기에 귀기울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더라도 무슨 맛인지 먹는 둥 마는 둥 먹어치워야 한다는 말인가?
각종 운동 경기에 가담하는 것도 금하고, 물질적인 이익을 주는 모든 경제 활동에서도 물러서야 한다는 말인가?
만약 이 모든 것을 금한다면 삶은 김도 맥도 다 빠져 버려 밋밋하고 싱겁기 그지없는 무엇이 되고 말 것 같다.


상상해 보라. 각종 색깔로 찬란하게 채색된 자연을 보면서 그 아름다움을 찬탄할 줄 모르는 삶, 아름다운 선율로 이어지는 음악이 들려 와도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줄 모른 삶, 음식을 먹되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죽을 때까지 그저 먹기만 해야 하는 삶, 이런 삶을 이상적인 삶이라 할 수 있겠는가?


신나는 삶이란 이런 감각적인 것들에 전적으로 무감각하거나 무신경하거나 무관심한 삶이라 할 수 있겠는가?
신나는 삶이란 이런 감각적인 것들에 전적으로 무감각하거나 무신경하거나 무관심한 삶이 아니라 오히려 아름다운 색깔, 아름다운 소리, 아름다운 맛을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알아보고, 놀랍고 고마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삶이다. 영어로 표현해서 'appreciate'할 줄 아는 삶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감각적 즐거움에 지나치게 빠져 버리는 것, 탐닉하는 것, 몰두하는 것,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다. 이런 즐거움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여겨지지 않고 우리의 절대적 관심, 절대적 충성, 절대적 희생을 요구하는 최고 가치, 최고 목표로 둔갑하는 것이 문제이다. 전통적인 용어를 쓰면 '집착'이요, 요즘 말로 하면 '탐닉' 이나 '중독'이요, 종교 용어로 하면 상대적인 가치를 절대화하는 '우상 숭배'이다.


감각적인 즐거움이나 외면적인 가치가 이렇게 우리의 '궁극 관심'이 되면,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를 바쳐 좀더 보기 좋은 것, 좀더 듣기 좋은 것, 좀더 맛있는 것, 좀더 재미나는 것, 좀더 수지맞는 것 등을 추구하느라 그야말로 눈코 뜰 사이가 없게 되고 만다.

심하면 괴상한 모양, 괴상한 소리, 괴상한 맛, 괴상한 짓, 괴상한 수단을 찾거나 꾸며 내게 된다. 이런 세상적 가치가 최고 가치로 군림하게 되어 우리는 그 앞에 무릎을 끓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이를 경배한다.

우리는 꼼짝없이 이런 것의 지배를 받는 노예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즐거움이 우리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런 것을 섬기게 되는 묘한 아이러니가 성립되는 셈이다.


이렇게 될 때 어떻게 모든 색깔의 근원, 모든 소리의 근원, 모든 맛의 근원, 모든 움직임의 근원, 모든 가치의 근원이 되는 우주의 궁극 실제에 우리의 관심을 돌릴 겨를이 있겠는가?
깊은 차원의 세계에 대한 '감지의 문(the doors of perception)'이 막혀 버린 셈이다.

그러므로 참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런 감각적, 의식적 현상 세계의 일을 최고 가치로 떠받드는 대신, '배'로 상징되는 내면적이고 원초적인 내실內實을 우선 가치로 여긴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상 세계의 현란함에 눈이 멀고 귀가 멀고 마음이 들뜬 사람들인가? 아니면 이런 현상 세계 너머에 있는 실상 實相 세계에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내면적 가치의 추구자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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