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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릉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2부, 소릉의 박학) -정약용 지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2부​ ​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 소릉의 박학 소릉은 구경(九經)을 막힘없이 술술 외웠으며, 백가서(百家書)에도 두루 관통하여 빠트림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시험해보려고 흔히 볼 수 없는 글에서 한 글자 반 구절을 따다가 갑자기 묻자, 공은 그 글의 전문(全文)을 외워 10여행(行)을 그치지 않고 술술 내려가니 시험하던 사람이 도리어 어이없어하였다. ​ 갑인년(1794) 겨울에 도감당상(都監堂上)이 되었을 때 '개운(開運)' 등 여덟 글자의 휘호를 올리기로 의논하였는데, [금등(金燈)] 의 뜻*이 모두 빠져 있어 임금이 휘호를 고치고 싶어했으나 적당한 이유로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공이 아뢰기를 "개운은 석진(石晉)*의 연호(年號)입니다"라고 해서 드디어 .. 더보기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2부, 시는 어떻게 써야 하나) -정약용 지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2부​ ​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 시는 어떻게 써야 하나 又示二子家誡 ​ 번웅(樊翁:채제공 蔡濟恭)은 시에 있어서 시인의 기상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유성의(劉誠意)*의 시를 읽을 때마다 기상의 약한 듯 처량하고 괴로운 내용이 있었고, 소릉(少陵)*의 시에는 번화하고 부귀한 시어가 많았지만 끝내 뇌양(耒陽)*에서 곤궁하게 살다가 죽었으니, 꼭 그렇게 시와 기상이 관계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 요즘 내가 상자 속에 넣어둔 옛날 시고(詩篙)들을 점검해보니 난리를 만나기 전, 즉 한창 벼슬을 하여 문학하는 선비들이 들고 나던 한림원(翰林院)을 훨훨 날며 지내던 때 지은 시편들은 대개가 처량하고 괴로우며 우울한 내용이었고, 장기에 유배 갔던 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