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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독서HAZA365>/책속글귀-2016년

책속글귀- 백산의 연인 中 (by 주부독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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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랭이꽃은 꽃 모양이 하층 백성들이 머리에 썼던 '패랭이'를 거꾸로 놓은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패랭이는 양반들이 썼던 거록한 삿갓과는 그 격이 다르다. 패랭이꽃은 "패랭이에 숟가락 꽂고 산다."고 하여 세간이 아주 보잘 것 없음을 나타내는 속담에도 들어갈 만큼 민초를 상징힌다. 낮은 곳에만 피었다가, 역시 낮게 지고 만다. 꽃잎은 연자주색.
 
 
일본은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는 전적으로 민간 업자의 소행이었다며 일본군의 관여를 전면 부정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한국인 피해자 보상 문제 또한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과 1965년 한일 협정으로 이미 끝났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선행은 바위 위에 새겨지고, 악행은 모래 위에 씌어진다고 믿고 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위안부들은 철저하게 버려졌다. 일본군이 패주하면서 소개 사실을 알리지 않아 연합군의 폭격으로 많은 위안부들이 사망하였다.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은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귀국하거나, 개별적으로 힘겹게 돌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돌아오는 방법을 몰랐거나 알았어도 포기하고 타국에 잔류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직도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그들이 원하는 배상은 다음과 같은 7개 항이다.
1. 일본군 위안부 범죄인정
2. 진상규명
3. 국회 결의 사죄
4. 법적 배상
5. 역사 교과서 기록
6. 위령탑과 사료관 건립
7. 책임자 처벌
 
 
1945년 8월 14일, 일본군이 조선 여성들을 한곳에 모았다. 70~80명이었다. 수로처럼 긴 구덩이가 이미 파져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도망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 수로 언덕에 세워졌다. 앞에는 일본군 트럭이 서 있었다. 이윽고 뒤로 돌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연이어 요란한 총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여자들이 낙엽처럼 구덩이로 떨어졌다. 일본군은 시체 위에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불을 질렀다.
 
 
중국 광동성의 일본군 부대에서 12명의 위안부가 도망쳤다. 그러나 이틀 뒤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일본군은 맨 처음 도망치자고 제안한 여자를 가르쳐 주면 주모자 이외는 모두 살려준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위안부 한 명이 대표로 끌려 나갔다. 그녀는 철봉으로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아 실신했다. 그러자 고무호스를 입에 넣고 물을 틀었다. 부풀어 오른 배 위에 판자가 올려졌다. 그 널빤지 위에 군인들이 올라가 널뛰기를 하였다. 위안부의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위안부는 다시 기절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그녀의 발목을 끈으로 묶어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고 바늘이 빽빽하게 박힌 검은 몽둥이를 들고 와 그녀의 입속에 쑤셔 넣었다.
 
 
한 위안부가 매독에 걸린 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한 장교가 병에 걸려 주었다. 다른 장교가 그 위안부의 자궁에 벌겋게 달군 쇠막대를 넣었다. 위안부는 즉사했다. 뽑아낸 막대에는 검게 탄 살점이 매달려 있었다.
 
 
위안소는 일본군 문서상 군 위안소. 군인 클럽, 군인 오락소, 혹은 위생적인 공중변소 등으로 불렀다. 그곳으로 끌려간 조선 여성들은 하루 두 깨의 주먹밥을 먹으며 하루에 보통 15명에서 많으면 100명까지 성관계를 가지는 고문을 받았다. 지하나 은밀한 곳에서 성 고문 기기만 사용하는 곳도 따로 있었다. 주로 매독이나 임질 등에 걸리면 발견 즉시 따로 격리되어 매장을 당하거나 처형을 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만약 임신을 할 시에는 태아와 자궁을 통째로 들어냈다.
 
 
일본군들은 조선 여성을 유난히 좋아했다. 일본의 여성들과는 달리 정조 관념이 투철했던 조성 여성을 더 선호했다는 것은 기록에서 뿐 아니라 범죄에 동참했던 당시 현역 일본군들의 증언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당시 일본군들은 강제로 데려온 각국이 여성들에게는 성병 검사를 실시하였지만 유독 조선 여성은 대부분 실시하지 않았다.
 
 
일본은 <일본군 위안부>를 작부. 창기. 추업부 따위로 불렀다. 그러나 이 용어들은 본질적인 면을 드러내는 용어가 아니다. 이 용어들은 이런 제도를 만든 일본의 일방적인 당위성을 포장한 용어로서 피해자 측의 시각은 전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국제 활동을 통해 명명된 <일본군에 의한 성 노예>가 그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용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에서조차 <일본군 위안부>로 당시 쓰이던 역사적 용어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강제로 성 노예가 되었던 여성 본인들조차 성 노예란 말 자체를 꺼리기 때문이다.
 
 
1941년 12월 일제는 '노무 조정령'이라는 법을 선포하였다. 일본이 원하면 언제, 어느 때, 누구든 징발하기 위해서였다. 오직 일본을 위해 마소처럼 장닝한 노역을 감당할 노예가 필요했던 것이다. 조국을 운운하며 나라 타령을 하던 양반들은 비켜 갔다. 그러나 풀뿌리 죽 한 사발에 목숨을 구걸하던 사람들은 동서남북으로 뿌려졌다. 홋카이도 광산 한 곳에만 배치된 한인 노무자 수만 약 14만 5천 명, 그들은 갱이나 공사장에서 가혹한 노동과 매몰 사고로 죽었다. 그러나 갱도가 매몰되어도 시신조차 수습되지 않았다. 그렇게 해방전까지 일본으로 간 징용자는 236만여 명. 일제 강점기 36년간 일제 억압에 의해 이주해 가거나 강제 동원됐던 한인의 숫자는 무려 약 500만 명. 해방 당시 한번도 총인구가 약 2천 500만 명이었으니, 총인구의 20%에 달하는 사람들이었다.
 
 
 1938년 일제의 소위 '국가 총동원법'이라는 발포와 함께 <일본군 위안부>가 생겨났다. 대대적인 조선 처녀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그로부터 1945년 8월까지 약 20만 명의 조선 여성이 일본군의 성 노예가 되었다. 아무도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개나 돼지처럼 붙잡혀 능욕을 당하는 그들 옆에는 부모형제도 없었고, 조국도 없었다. 행여 그들로 하여 우는 사람도 없었다. 그곳에서 죽은 이는 오히려 행복했다. 그들의 육신은 갈갈이 찢겨졌다. 그들의 여혼은 산산이 흩어졌다. 그러나 그들을 지옥보다도 못한 그곳으로 몰아놓은 것은 일본이 아니었다. 아직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었다.
 
출처: 백산의 연인 -우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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