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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작가/워킹작가의 일상생각2022년

스스로 못나 쓰이지 못함을 믿기에 -서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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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작가의 일상생각

 

 

​스스로 못나

쓰이지 못함을 믿기에

 

술동이에 깊이 빠져

생애를 보내노라.

 

서거정

[사고와 평중이 장화한 시에 차운하여,]

 

'스스로 못나' 라고 칭하는 자는 대부분 그렇지 아니한 경우가 많다. 겸손에서 드러난 말인듯하다. 서거정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지 못하면 시를 이해할 수 없을것 같다. 검색을 통해 서거정에 대해 알아본다.

 

 

조선시대 한유에 비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을 들 수가 있다.

서거정은 세조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하면서 성종대까지 국가의 편찬 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오랜 기간 대제학을 지냈으며, [경국대전], [삼국사절요], [동문선] 등 주요 책의 서문을 작성한 ‘서문 전문가’였다.

그의 명문들은 [사가집(四佳集)]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조선전기 최고의 문장가

 

[중략]

 

 

선비 중에 입덕(立德)ㆍ입공(立功)ㆍ입언(立言), 즉 삼불후(三不朽)의 아름다움을 겸비한 자가 드물지만 영원히 전해질 훌륭한 일이 되는데,

하물며 말(言)은 학문의 모범이 되고 공(功)은 관직의 일정한 직무를 지킨 데에 있으며 덕(德)은 인망에 부응하는 달성(達成) 서공(徐公, 서거정) 같은 분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니 그 영원히 전할 것에다 무엇을 더할 것이 있겠는가?

- [국조인물고] 권12, 경재(卿宰) 서거정(徐居正)

 

[중략]

 

특히 서거정이 각종 서책의 서문을 작성한 것이 눈에 띈다. [사가집] 권4~권6까지 실려 있는 서문만도 70편 이상이다.

국가에서 편찬한 책들의 서문을 도맡아 썼다는 데서 그만큼 그에게 그 편찬물에 대한 책임감이 부여되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국가 기록물의 서문을 쓰는 자는 국가에서 그 책을 만든 의도를 명확하게 간파하고 있어야 했을 것이고, 서거정은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서문 전문가’로 발탁된 것으로 파악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서거정 [徐居正] -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학자 (인물한국사, 신병주, 장선환)​

 

 

 

​서거정은 온량간정(溫良簡正: 온화하고 무던하며 간소하고 바름)하고 모든 글을 널리 보았고 겸하여 풍수(風水)와 성명(星命)의 학설에도 통하였으며, 석씨의 글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문장을 함에 있어서는 고인(古人)의 과구(科臼: 규범)에 빠지지 아니하고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어서, [사가집] 30권이 세상에 행한다. [동국통감]ㆍ[여지승람]ㆍ[역대연표]ㆍ[동인시화]ㆍ[태평한화]ㆍ[필원잡기]는 모두 그가 찬집(撰集)한 것이다.

정자를 중원(中園)에 짓고는 못을 파고 연(蓮)을 심어서 ‘정정정(亭亭亭)’이라고 이름하고, 좌우에 도서를 쌓아 놓고 담박한 생활을 하였다.

서거정은 한때 사문(斯文)의 종장(宗匠)이 되었고, 문장을 함에 있어 시를 더욱 잘하여 저술에 뜻을 독실히 하여 늙을 때까지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 [성종실록] 1488년(성종 19) 12월 24일(계축)

 

그러나 실록의 졸기 뒷부분에는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기술되어 있다.

 

 

조정에서는 가장 선진(先進)인데, 명망이 자기보다 뒤에 있는 자가 종종 정승의 자리에 뛰어오르면, 서거정이 치우친 마음이 없지 아니하였다.

서거정에게 명하여 후생(後生)들과 더불어 같이 시문을 지어 올리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서거정이 불평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자격이 없을지라도 사문(斯文)의 맹주로 있은 지 30여 년인데, 입에 젖내 나는 소생(小生)과 더불어 재주 겨루기를 마음으로 달게 여기겠는가? 조정이 여기에 체통을 잃었다.”하였다.

서거정은 그릇이 좁아서 사람을 용납하는 양(量)이 없고, 또 일찍이 후생을 장려해 기른 것이 없으니, 세상에서 이로써 작게 여겼다.

- [성종실록] 1488년(성종 19) 12월 24일(계축)

 

 

 

[성종실록]을 편찬한 사관(史官)들은 서거정의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있다.

그가 생전에 혁혁한 공을 이루었지만, 속이 좁고 후진 양성에 적극적이지 못했다는 비판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의 일부는 수용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훈구파가 점차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16세기 사림파의 시대가 열리는 상황도 자리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서거정은 훈구파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사림파의 시각에서는 부정적인 요소가 많은 인물이었다. 그가 중심이 되어 편찬한 역사서ㆍ지리지 등이 사림파 인사의 참여하에 개찬되었던 현실도 조선초기 최고의 문장가 서거정의 입지를 좁혀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전기 서거정이 완성한 문장 능력은, 체제의 정비와 문화 발전에 든든한 자양분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거정 [徐居正] -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학자 (인물한국사, 신병주, 장선환)

서거정에 대한 대략적으로 보고나니 위의 시가 좀전보다 이해가 된다. 명시의 전문을 들여다 본다.

 

​사고(士顧), 평중(平仲)이 창화한 데에 차운하다. -徐居正(서거정):朝鮮-

 

하염없는 세월에 잎은 가지를 떠나는데

공명에 뜻을 잃어 감개한 마음 그지없네

 

만사 속에 이 한 몸은 구름처럼 흔들리고

백 년 중에 두 귀밑은 눈꽃처럼 희었는데

 

미친 말은 자주 뱉어 남의 조소를 받지만

연구는 수시로 읊어 내 노래로 삼는다네

 

거칠고 게을러 인재 아님을 스스로 믿기에

술잔만을 깊이 의지해 생애를 보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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