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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4부, 문장이란 어떤 물건인가 ) -정약용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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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4​부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말

 

이인영에게 당부한다

爲李仁榮贈言


 

문장이란 어떤 물건인가

 

내가 한강(漢江)가 마현(馬峴)에 살 때였다. 하루는 잘생기고 예쁘장한 소년이 찾아왔는데 등에 짐을 지고 있기에 보니 책상자였다.

 

누구냐고 물으니

"저는 이인영(李仁榮)입니다"라고 하였다(몇 구절 삭제하였다-지은이). 나이를 물으니 열아홉이라고 했다.

그의 뜻을 물으니, 뜻은 문장에 있는데 비록 공명(功名)에 불리하여 종신토록 불우하게 살게 될지라도 후회없을 것이라 하였다.

그 책상자를 쏟으니, 모두 시인 재자(才子)의 기이하고 청신한 작품들이었다. 혹은 파리 머리처럼 가늘게 쓴 글도 있고 혹은 모기 속눈썹같이 미세한 말도 있었다.

그의 뱃속에 들어 있는 지식을 기울여 쏟으니 호리병에서 물이 흐르듯 흘러나왔는데, 책상자에 있는 것보다도 수십배나 많았다.

그의 눈을 보니 광태가 흐르고 있었으며, 이마를 보니 툭 불거진 이마 중간이 밖으로 비치는 듯하였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아, 자네는 앉게나. 내 자네에게 이야기해주겠네. 대저 문장이라는 것은 어떠한 물건인가 하면, 학식이 속에 쌓여 그 문채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네.

이는 기름진 음식이 창자에 차면 피부에 광택이 드러나고 술이 뱃속에 들어가면 얼굴에 홍조가 도는 것과 같은데, 어찌 들어가기만 해서 이룰 수 있겠는가.

중화(中和)한 덕으로 마음을 기르고 효우(孝友)의 행실로 성(性)을 닦아 공경으로 그것을 지니고 성실로 일관하되 이를 변하지 않아야 하네.

이렇게 힘쓰고 힘써 도(道)를 원하면서 사서(四書)로 몸을 채우고 육경으로 지식을 넓히고, 여러가지 사서(史書)로 고금의 변천에 달통하여 예악형정(禮樂刑政)의 도구와 전장법도(典章法度)의 전고(典故)를 가슴속 가득히 쌓아놓아야 하네.

그래서 사물과 서로 만나 시비와 이해에 부딪히게 되면 마음속에 한결같이 가득 쌓아온 것이 파도가 넘치듯 거세게 소용돌이쳐 세상에 한번 내놓아 천하만세의 장관(壯觀)으로 남겨보고 싶은 그 의욕을 막을 수 없게 되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네.

그리고 이것을 본 사람은 서로들 문장이라고 말할 것이네. 이러한 것을 일러 문장이라고 하는 것이네. 어찌 기괴한 문구의 탐색만으로 이른바 문장이라는 것을 찾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일컫는 문장학(文章學)은 성인의 도를 해치는 좀벌레이니 반드시 서로 용납할 수 없을 것이네. 그러나 한단계 낮추어서 가령 그것을 공부한다 해도 또한 그 가운데 들어가는 문이 있으며 나오는 길이 있고 기(氣)와 맥(脈)이 있는 것이니,

반드시 경전을 근본으로 삼고 여러가지 사서(史書)와 제자백가를 보조로 삼아, 혼후하고 충융(沖融)한 기운을 쌓고 깊숙하고 영원하고 도타운 아취(雅趣)를 길러야 하네.

그리하여 위로는 왕의 정책을 빛낼 것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한세상을 주름잡을 것을 생각한 뒤에야 바야흐로 범상치 않은 문장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네.

 

 

그런데 지금 세상에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네. 나관중(羅貫中)*을 시조로 삼고 시내암(施耐菴)*과 김성탄(金聖嘆)*을 조상의 신주처럼 떠받들어 앵무새가 혓바닥을 왼쪽으로 뒤집었다 오른쪽으로 젖혔다 하면서 재잘거리는 것 같은 음탕하고 괴상한 말로 문채를 내고는 은근히 스스로 기뻐하는 것이 어떻게 문장이 될 수 있겠는가?

너무 처량하여 귀신이 흐느끼는 듯한 시구(詩句)는 온유독후(溫柔敦厚)한 교훈이 아니네.

음탕한 곳에 마음을 두고 비분한 곳에 눈을 돌려 혼을 녹이고 애간장을 끓는 말을 명주실처럼 늘어놓는가 하면 벼를 깎고 골수를 에는 말을 벌레가 우는 것처럼 내놓아,

그것을 읽으면 푸른 달이 서까래 사이로 비치고 산귀신이 구슬피 울며 음산한 바람에 촛불이 꺼지고 원한을 품은 여인이 흐느껴 우는 것 같네.

이같은 것은 문장가에게만 정도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상(氣像象)이 처참해지고 심지(心地)가 각박해져서 위로는 하늘의 큰 복을 받을 수 없고 아래로는 세상의 형벌을 면할 수 없네.

명(命)을 아는 자는 크게 놀라서 재빨리 피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 하물며 몸소 타고 따를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과거제도는 쌍기(雙冀)*에서 시작되어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에게서 갖추어졌네.

무릇 이 과문(科文)을 익히는 자는 정신을 녹이고 세월을 허비하게 되기 때문에 무디고 거칠며 지리멸렬하게 그 생애를 마치게 되니, 참으로 이단 가운데서도 제일이고 세도(世道)의 큰 걱정거리네.

그러나 국법이 변하지 아니하니 이를 순순히 따를 뿐이며, 이 길이 아니면 군신(君臣)의 의리를 물을 데가 없다네.

그래서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같은 선생들도 모두 이 과문을 닦아서 발신(發身)했다네.

그런데 지금 자네는 어떤 사람이기에 신발을 벗어던지듯이 돌아보지 않는가?

성명(性命)을 밝히는 학문을 한다면 굳이 막지는 않겠네만, 어찌 음탕하고 교사한 소설 나부랭이나 괴롭고 고달픈 단구(短句)처럼 하찮은 것에 노력하느라

이 신세를 아래로는 처자를 부양하지도 못하며, 가까이는 문호(門戶)를 드러내어 종족을 비호할 수도 없고 멀리는 조정을 떠받들어 백성을 윤택하게 할 수도 없는데, 나관중과 시내암의 사당에 나아가 배향(配享)되기만을 생각하고 있으니, 또한 미치고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원컨대 그대는 지금부터 문장학에 대한 뜻을 끊고 빨리 돌아가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게.

그리하여 안으로는 효우의 행실을 돈독히 하고 밖으로는 경전공부를 부지런히 함으로써 성현의 격언이 항상 몸에 배어 어기지 않도록 하게.

 

곁들여 과거공부도 닦아 발신을 꾀하여 임금을 섬길 수 있도록 노력하게.

이렇게 하여 소대(昭代)의 상서로운 인물이 되고 후세의 위인이 되도록 힘쓸 것이요, 경망스러운 취미 때문에 천금 같은 몸을 경솔히 버리지 말게.

진실로 자네가 문장에 대한 집념을 고치지 않는다면, 마조(馬弔) 강패(江牌) 협사(挾斜)의 놀이도 이것보다 더 나쁘지는 않을 것이네." (순조 20년 경진년 5월 1일 -지은이)

 

 

 

 

*나관중: 중국 원나라 말엽의 항주 사람. 본래 이름은 본(本)인데 자인 관중으로 알려졌다. [삼국지(三國志)]의 저자로 이름난 문필가였다.

*시내암: 중국 원나라 동도(東都) 사람. 이름은 자안(子安). 원말의 저술가로 [수호전(水滸傳)]의 저자로 유명하다.

*김성탄: 중국 명나라 말엽의 장주(長洲) 사람. 본디 성은 장(張)이고 이름은 채(采)인데 뒤에 김위(金喟)라고 고쳤다. 성탄은 자이다. [서상기(西廂記)]의 저자로 유명한 문인이었고, 청나라 초기에 활동했다.

*쌍기: 고려 때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사람으로 광종을 도와 과거제도를 수렵했다.

*변계량:1369~1430. 호는 춘정. 조선 초기 과거 문장이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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