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빨강이어서 행복하다! 나는 뜨겁고 강하다. 나는 눈에 띈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를 거부하지 못한다.나는 숨기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섬세함은 나약함이나 무기력함이 아니라 단호함과 집념을 통해 실현된다. 나는 나 자신을 밖으로 드러낸다. 나는 다른 색깔이나 그림자, 붐빔 혹은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기다리는 여백을 나의 의기양양한 불꽃으로 채우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내가 칠해진 곳에서는 눈이 반짝이고, 열정이 타오르고, 새들이 날아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나를 보라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를 보시라, 본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다는 것은 곧 보는 것이다. 나는 사방에 있다. 삶은 내게서 시작되고 모든 것은 내게로 돌아온다. 나를 믿어라!
"평생 신념을 갖고 열심히 일한 결과, 자연스럽게 장님이 되는 우리 세밀화가는 빨강이 어떤 색이고, 어떤 느낌인지를 알고 기억하지. 그런데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었다면 지금 이 견습생이 칠하고 있는 빨강을 어떻게 알 수 있겠나?"
기억만으로 그림을 그리는 세밀화가의 물음에 다른 세밀화가가 대답했다.
"훌륭한 의견이오. 그렇지만 색이란 아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지."
"그렇다면 자네는 한번도 빨간색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빨강의 느낌을 어떻게 설명하겠나?
손가락 끝으로 만져보면 그 느낌이 철과 동의 중간쯤 되지.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뜨거울 테고, 손으로 쥐어보면 소금기가 아직 남아 있는 물고기처럼 느껴지겠지. 입에 넣으면 입 안이 꽉 찰 테고, 냄새를 맡으면 말 냄새가 나겠지. 꽃의 향기로 치면 붉은 장미보다는 국화 향기와 비슷할 걸세."
"그렇다면 빨강의 이미는 무엇인가?"
기억에 의지해 말을 그리는 장님 세밀화가가 물었다.
"색의 의미는 그것이 우리 앞에 있다는 뜻이며, 그것을 우리가 본다는 것을 뜻하지. 보이지 않는 사람에겐 빨강을 설멍할 수 없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 이단자, 불신자들은 신을 부정하고자 할 때 신이 봉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네."
"그러나 신은 보는 사람에게는 보이네. 그래서 코란에는 보는 사람과 보지 않는 사람이 절대로 같지 않다고 쓰어 있지."
그 순간에도 견습생은 말의 안장 덮개를 천천히 나로 칠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림의 검고 흰 부분을 나의 충만함과 힘 그리고 생동감으로 채우는 것은 너무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붓이 나를 종이에 퍼지게 할 때는 온몸이 근질거리듯 즐거웠다. 이렇게 내가 칠해지는 것은 마치 이 세상을 향해 "되라!"라고 하자마자 세상이 온통 나의 핏빛 색으로 물드는 것과 같은 일이다. 나를 보지 않는 사람은 나를 부인하겠지만 나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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