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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독서HAZA365>/책속글귀-2017년

세종의 적솔력 中 -박현모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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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농부(문어농부(問於農夫))
현장에 답이 있다.

'이날 행차에 다만 그날 근무하는 호위군관 한 명만 거느리고,
임금이 쓰는 홍양산과 부채를 쓰지 않았다.
벼가 잘되지 못한 곳을 보면,
반드시 말을 멈추고 농부에게 까닭을 물었다."
<세종실론>재위 7년 7월 1일




문어농부問於農夫
'농부에게 물었다'라는 뜻이다.

재위 7년째가 되는 1425년은 세종에게 가장 어려운 고비였다.
"20년 이래로 이와 같은 가뭄은 보지 못했다."
라는 세종의 말이 보여주듯이<세종실록7/7/7> 극심한 가뭄이 엄습했다.


가뭄을 걱정한 나머지 열흘 동안 꼬박 앉아서 날이 샐 때까지 기도하던 세종은 급기야 몸져눕고 말았다.
50여일의 와병(臥病) 중 열흘간은 조정에서 장례를 준비해야 할 절도로 위태로웠다.
<세종실록>7/7/28,  7/윤7/19,  7/윤7/24)


이런 와중에도 조정 관리들의 태도는 한심했다.
"한 사람이 옳다 하면 다 따라서 옳다 하고, 한 사람이 그르다 하면 다 따라서 그라다"하며
뇌동(雷同)하는 풍토가 만연했고<세종실록7/7/7>,


지방 근무를 꺼려 정승과 환관에게 서울 근무를 청탁하기도 했다
.<세종실록> 7/7/25


병조에서 보고한 것을 보면, 흉년으로 경기도 사람들이 집단 도망하여 그곳 선군(船軍)중 732명이 결원되어 "해변 방어가 매우 허술한"지경에 이르렀다<세종실록7/8/1/>


이런 상황에서 세종이 취한 것은 현장에 나가 직접 보는 것이었다.
제시된 인용문은 재위 7년 7월 1일 자 실록 기사다.


이날 세종은
"가뭄이 너무 심하다.소니가가 잠시 내렸으나, 안개가 끼고 흙비가 왔을 뿐이다.
기후가 순조롭지 못하여 이렇게 되니,장차 나가서 벼농사 형편을 보리라"했다.


그리고 드디어 도성이 서문 밖에 나가 영서역(迎曙驛:지금의 서울 은평 구 대조동과 불광동 사이)과 홍제원[弘濟院]주변을 두루 살폈다.


그런데 인용문에서 보듯이 왕은 이날 행차에 그날 입직한 호위군관 한 명만 따라오게 하고, 홍양산繖과 큰 부채扇 등을 생략하게 했다.


경호와 권위를 상징하는 장치들을 제거하고 그야말로 단기필마로 백성들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인상적인 것은 벼가 잘 자라지 못한 곳을 보면 반드시 "말을 멈추고 농부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라는 말이다. 들판의 농부에게 다가가 무엇이 제일 아쉬우며, 어떤 것을 도와주면 좋겠는지 묻고 경청한 것이다.

 

 








생생지락 (生生之樂)
즐거운 일터 만들기는 리더의 소명이다.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백성은 먹을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
농사짓는 일은 의식(衣食)의 근원으로서 왕의 정치에서 우선적으로 힘써야 할 것이다.
오직 그 일만은 백성 살리는 소명에 관계되는 까닭에, 천하 사람들이 지극한 노고를 마다치않고 왕을 섬기는 것이다.
위에 있는 사람이 성심으로 지도하고 이끌지 않는다면,
어떻게 백성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농사에 전념하면서 그 생업을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세종실록> 재위 26년 윤7월 25일



생생지락(生生之樂) 이란
'생업을 즐겁게 만든다'는 뜻이다.

제시된 인용문은 세종이 지방의 수령들에게 농부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농사 지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우라고 당부하는 글이다.
북방영토 개척 때도 세종은 '생생지락', 즉 모두가 꿈꾸는 좋은 나라를 이야기했다 .

위에 문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는 농사 짓는 것을 중요성이다.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을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이 말은 세종이 애용하는 문장인데 한마디로 백성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수량과 왕은 자격이 없다는 얘기다.


둘째는 천하사람들이 지극한 노고를 하면서도 왕을 섬기는 것은 바로 농사를 지어 백성들을 입히고 먹이는 소명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첫 번째 문장에이어서 민생을 해결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셋째는 백성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수령 등 '위에 있는 사람'이 성심으로 지도하고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종은 <서경>의 이 구절을 좋아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생생지락이란 말을 가장 많이 언급한 왕이기도 하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은 수령을 지방에 내려 보내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편히 살면서 직업에 흥미를 가지게 하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생생지락을 유독 북방영토 기적과도 관련해 자주 언급했다.
새로 개척한 지역일수록 구성원들로 하여금 자기 일터를 즐겁게 여기게 하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세종은 생생지락 하는 공동체가 되려면 다음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첫째는 국경의 안정성이다.
세종은 나라의 울타리가 안정될 때 생생지락이 가능하다고 하여 왜적의 침입을 방지하는 일을 중요성을 강조했다.

둘째는 안정된 직업이다 .
함경도의 나가있는 김종서에게 세종은 여진족을 우리나라 사람으로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곳에서 땅을 일구며 살거나 조선 사람으로 귀화하여 관직을 맡을 수 있게 하라고 말했다.


셋째는 부모와 친척을 자유롭게 만나 보게 하는 것을 생생지락 조건으로 꼽았다.
한마디로 나라가 평화롭고 직장이 안정되어 있으며 가족이 우애롭다면 누군가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려 해도 꿈쩍하지 않을 것이라는게 세종의 생각이었다.

세종의 적솔력 중 -박현모 저







성심적솔 (誠心迪率)
정성스런 마음으로 앞장서서 행하라

"위에 있는 사람이 성심으로 인도하고 솔선수범하여 이끌지 않는다면 어찌 백성들이 자기 일에 힘써 노력하겠는가?"
<세종실록> 재위 26년 윤 7월 25일


성심적솔(誠心迪率)이란 
'성심으로 앞장서서 행하라'는 말로 정성스런 마음으로 솔선수범 하라는 뜻이다.


성심적솔 ,이 말은 리더십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세종 어록이다.
지도자가 정성스런 마음으로 솔선수범 하면 백성들도 자기가 맡은 일에 힘써 노력하면서 나를 것이라는게 세종의 생각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세종이 이 권농 교서에서' 밥 문제'에 획기적인 해결을 위해 마련한 <농사직설> 속 선진 농업기술의 전파 방법이다.
 "누구든 나와 함께 착한 정치를 같이 하려는 자들은 내가 위임한 뜻을 본받아서 조정(祖宗)께서 백성에게 후하게 하셨던 전통을 준수하고, 이전에 어진 사람들이 농사를 권과한 규범을 보며, 널리 그 지방의 풍토에 마땅한 것을 널리 묻되,농서를 참고하라.
시기에 앞서서 미리 조치하되 너무 이르게도 말고 너무 늦게도 하지 말라"는 말이 그것이다.









재가 독서 在家讀書
어려운 때가 인재 교육에 전념 할 때다 .

"각각 직무로 인하여 아침 저녁으로 독서의 전심 할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본전( 집현전)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진심으로 글을 읽어 성과를 나타내도록 하라"
<세종실록> 재위 8년 12월 11일



제가 독서在家讀書
'집에 머무르면서 독서 한다'라는 뜻이다

유명한 사가독서를 시행하라는 세종의 지시가 나타난 실록의 대목이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1819년~1901년 때의 섹스피어 휴가 와 비슷한 제도다.
고위 신하들에게 3년에 한 번 꼴로 한 달 남짓의 유급 독서 휴가를 주면서 셰익스피어작품 중 5편을 정독한 뒤 독후감을 제출하도록 했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조선에서 그 제도가 시행되는 것은 그보다 400여 년이나 앞선 때였다.
이 시기는 세종 재위중 가장 어려운 때였다.

 중부 지방을 휩쓴 대기근으로 서울과 경기도에 백성들이 남쪽으로 대거 이동한 것이 불과 2~ 3년 전 일이었다.
 전라도에 만 무료 7138 명의 유리걸식 한다는 보고 하나만으로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730 여명의 경기도 군인들이 집단으로 근무지를 이탈해서 "해변 방어가 매우 호소하다" 는 보고 역시 위태로운 상황을 여실히 드러낸다.
< 세종실록> 7/8/18
.....


세종이 최대의 위기 때 인재 교육의 가장 집중적으로 투자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바로 어려울수록 '인력으로 할 수 없는 것' ,즉 지금과 같은 왜적 환경을 탓하기 보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 즉 인재 교육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세종의 적솔력 중에서 -박현모 저






하대 무인 何代無人
인재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중요하다.

" 어느 시대인들 사람이 없으랴 했거니와,
 지금도 역시 사람은 반드시 있을 것이로되, 대단한 알아보고 쓰는 것을 못 할 따름이다."
< 세종실록> 재위 20년 4월 28일


하대무인何代無人이란
'어느시대인데 인재가 없으랴'라는 뜻이다.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의 일을 구제할 인재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라는 의미다.
 위 인용문의 사람은 있지만 몰라서 못 쓴다는 말은 인제를 보는 리더의 안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한 것이다 
세종도 집현전 학사들에게
"역대 제왕들의 사람 쓰는 법을 상고해 아뢰라"라고 지시한 적이 있다.

< 세종실록> 18/2/30


 

 





종일 토론 終日討論
함께 모여 치열하게 토론하라

"지금부터는 합하여 한 번씩 나와 와서 강講하게 한 후에, 경연청에 물러 가서 종일토록 토론하도록 하소서'"하니 임금이 그 말을 좇고, 또 점심밥을 주도록 명했다.

<세종실록> 즉위년 12월 17일



종일 토론終日討論이란
말 그대로 '온 종일 토론한다'라는 뜻이다.


세종시 되는 우리 역사상 가장 창조적인 시대였다.
 일본의 이토준 타로 등이 1983년에 편찬한<과학사 기술사사전> 을 보면, 세종 재위기간 임 1418년부터 1450년 사이에 세계를 뒤흔들만한 과학기술 업적, 즉 지금으로 치자면 노벨상을 받을 만한 업적이 무료 23권이나 쏟아져 나왔다.
같은시기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 독보적인 성과였다 .

중국 4건 일본 0건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 즉 유럽과 아랍 지역을 통틀어 19건이었다.
그야말로 15세기 과학 기술 세계 1등이 나라가 세종시대 조선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제시된 인용문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시종즉위 년인 1418년에 동지경연사 탁신은 세미나식 어전회의인 경연을 질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두 가지를 제안했다.

하나는 경연관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서 강독하는것 이고, 다른 하나는 경연 후에 다시 경연청에 모여서 종일토록 토론하게 하는 것이다.

경연관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라는 것은,
경연에 참석하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각자의 업무에 시간을 뺏시지 말고 집중해서 강독에 참여하게 하라는 의미다.

경연관은 정1품 영사로부터 정9품 전경에 이르기까지 해당 사안에 대한 다양한 부처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
북쪽의 국왕 앞에서는 사관 2인이 앉았고, 사관들 옆에서 좌우로 영사나 지사 등 재상금의 '일 맡은' 고위 관려들이 배석했으며, 맨 남쪽에는 '책의 강독을 맡은'시독관 등 집현전 학사와 언관들이 앉았다.

한마디로 '일 맡은' 재상과 '독서를 이끄는' 언관들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서 토론하게 해달라는 요청이었고, 세종은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다른 하나의 제안은 왕 앞에서의 경연이 끝난 후 경연관들끼리 경연청에 따로 모여 주어진 문제가 풀릴 때까지 '끝장 토론'을 하게 하자는 제안이었다.

이 제안 역시 세종은 흔쾌히 받아들였고, 나아가 그들에게 점심을 제공하라는 지시까지 했다.
한자리에 모여 식사하면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집중해서 토론하도록 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집단 지혜(group genius)의 발휘 조건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강점을 가진 사람들이 당면한 공동의 문제를 몰입해서 해결하려 할 때 최선의 결론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강점이 다른 사람이 한곳에 모여야(meet together) 하고, 그런 다음에는 그들 사이에 열띤 토론(violent discussion)이 있어야 한다.

서로 다른 강점을 가진 여러 사람이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함께 모여 열띤 토론을 멀이면 탁월한 한 사람이 내린 그것보다 못하지 않은 결정을 내릴뿐더라, 대체로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게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이다. (Aristotle, Politics> Book 3, ch.11)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음식 및 잔치에 비유하고 있다.
"
다른 식자재를 섞어 넣은 혼합 음식이 소량의 순수한 식자재만 넣은 음식보다 영양이 더 많은 것"처럼 , "여러 사람의 돈을 염출 해서 연 잔치가 한 사람의 비용으로 개최된 잔치보다 더 훌륭할 수"있는 것처럼, 다른 강점을 가진 사람들이 당면한 공동의 문제를 몰입해서해결하려 할 때 최선의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론이 최선인가 아닌가를 좌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특정의 전문지식보다는 대다수 사람의 감각(sense)과 의견(opinion)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건물에 대한 최종 평가는 건축가가 아니라 그 안에서 생활하게 될 사람들이 내리며,"
차려진 음식의 최종 평가자 역시 "요리사가 아니라 손님"
이라고 했다.
이 말은 국가나 기업의 리더가 마지막으로 고려해야 할 판단 기준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또한 토크빌은 미국 건국 초기 서부로 진출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집단 지혜의 사례를 설명했다.
이른바 '신대륙'에 막 도착했던 그들은 그리 '훌륭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저녁을 먹은 후 통나무집에 모여서 이튿날 어느 방향으로 향할 것인지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느 쪽으로 가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나올 것인지, 늪지와 인디언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방향은 어디인지에 대해 '사활을 건' 토론을 벌였다.

낮에 인근 지리를 조사한 젊은 사람의 정보와 나이든 사람의 경험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각자가 몰입해서 열띤 토론을 벌인 결과, 그들은 최악의 상황을 여러 차례 피할 수 있었다.


세종이 즉위한 후 처음으로 한 말이 "의논하자"였다.
그리고 긴급 사안이 발생했을 때 모두 한자리에 모여 의논하게 하되, 일의 잘된 것과 잘못된 것을 모두 말하게 했다.

이는 결국 집단 지혜를 발휘할 조건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경연에서 집단 창의를 이끌어내고, 좋은 의견이 나왔을 때 즉각 힘을 실어주었던 것이 놀라운 창조의 시대를 낳은 게 아닐까.



세종의 적솔력 中   -박현모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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