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
-조지훈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가벼히
-서정주
애인이여
너를 만날 약속을 인젠 그만 어기고
도중에서
한눈이나 좀 팔고 놀다 가기로 한다.
너 대신
무슨 풀잎사귀나 하나
가벼히 생각하면서
너와 나 사이
절깐을 짓더라도
가벼히 한눈파는
풀잎사귀 절이나 하나 지어 놓고 가려한다.
별을 보며
-이성선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렵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빛남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문정희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면
해가 질 때였을 것이다.
숨죽여 홀로 운 것도 그때였을 것이다.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을지도 몰라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으면
당신을 못 볼지도 몰라
입술을 열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면......
한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을
꽃 속에 박힌 까아만 죽음을
비로소 알며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의 심장이 지금 뛰는 것을
당신께 고백한 적이 있다면......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절박하게 허공을 두드리며
사랑을 말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해가 질 때였을 것이다.
시를 어루만지다 中 -김사인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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